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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같이 성장해야 한다

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를 읽고

by 꿈에 날개를 달자

살면서 제일 힘든 일을 꼽으라면, 나는 지체 없이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힘든 걸 알았다면 다시는 선택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키워놓고 보니 아이들은, 나에게 사랑이자 행복이자 감사함이다. 세상 모든 부모에게 아이를 키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 나에게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 아이를 키우라고 한다면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그때는 멋모르고 아이를 낳고 키웠지만, 키운다는 것의 중압감이 크다는 걸 알았다면, 둘씩이나 낳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바람. 내 의사와 상관없는 그 바람이,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그 바람이. 그때엔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한 것 같다. 아이의 모든 처음을 같이 할 수 있었고, 그만큼 추억도 많다. 끈끈한 전우애(?)가 있어서 일까? 아이들은 나에게 위로가 되고 웃음이 된다. 그럼에도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육아가 주는 그 무게감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분명 예쁘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건 내 안의 영혼과 진액을 모두 줘야 가능한 것 같다. 이젠 아이들이 내게 또 다른 진액들을 만들어 주고 있지만. ^^


일본 시즈오카의 한적한 시골. 이곳에는 유명한 대안교육시설 미래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노리코는 미래학교 여름방학 캠프에 참가해 이곳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미카와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각자의 생활에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고 연락도 끊기고 만다. 시간이 흘러 노리코는 어른이 되었다. 미래학교에서 발견된 백골 사체. 노리코는 사체가 혹 미카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백골 사체에 대한 사건 의뢰를 맡게 된 노리코. 미래학교는 아이들이 모여 생활하며 ‘생각하는 힘과 자립심을 가진 아이로 키워내는’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었다. 그 공동체가 낙원이었다면 왜 미카는 그때 엄마와 살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일까? 이상적인 미래학교의 아이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게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것일까?


함께 산다는 것에 ‘규칙’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안타까움. (488)


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하기에 결정한 교육, 아이를 생각하는 애정, 떨어져 살아간다는 선택, 자신의 상태. 왜 맡겼는지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명확한 이유를 그곳에서 찾으려 드는 것은 주변의 이기심이다. (537)


아이를 키우면서 나에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2. 인사 잘하기 3. 다른 사람에게 피해 가는 행동하지 않기. 이걸 지킨다면, 내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는 아이가 원하는 걸 하게 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제일 먼저 아이에게 물었고, 아이가 싫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했다. 인생이란 것이, 어차피 어른이 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어릴 때부터 하기 싫은 걸 하면서 키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평범하고 착하게 청년이 되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어리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보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공동 육아를 할 수 있는 단체가 있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자립심을 키워주고, 나는 육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이를 그곳에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보내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만 3살까지는 내가 끼고 키웠을 것이다. 매일 눈물이 나는 우울감이 있을지라도.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찰나의 행복. 그 행복이 나를 엄마답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대단한 모성애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그렇게 사랑이 가득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뭐랄까? 성실한 책임감(?)은 높다고 자부한다. 내가 아이를 잘 키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를 낳았으니 그에 따른 키움의 책임감은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어른이 필요했던, 아니 부모가 필요했던 아이들은 어른이 없는 자유로운 그곳에서 어른이 되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같이 있어 주는 부모가 되지 않는다. 자신은 그렇게도 같이 있는 부모를 원했으면서, 자신의 아이 또한 외롭게 만든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다면, 아마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부모가 된다는 것은 두렵고, 무섭고, 어렵다. 하지만 두렵고, 무섭고, 어려운 것을 이기는 것이, 바로 아이다. 아이가 나를 향해 웃어주고 아이가 나를 향해 말해주면 모든 것들이,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사라진다.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아니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나를 단련시킨다.


한 번 실수하는 것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인생이 된다고 했다.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라 미숙하고 어렵고 실수를 한다. 하지만 실수를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내 아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같이 성장해야 한다. 아이는 내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울과도 같다. 오늘 내 아이를 본다. 나는 아이들에게 괜찮은 부모인지. 같이 성장하는 부모인지. 꽤 두꺼운 책이지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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