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최규석)을 읽고
“나만 아니면 돼.” 한창 인기 있던 시절 1박 2일의 멤버들이 늘 하던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참 싫었다. ‘나만 아니면 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이면서, 이기적인 말인가? 어떤 순간에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생각. 하지만 나 역시 이 말에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동네 도서관에서 주최했던 ‘길 위의 인문학’ 행사에 참여했었다. 오전엔 강사의 강의를 듣고 오후엔 남산 일대를 돌아보며 일제강점기의 당시 건물과 터를 알아보는 일정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마음으로 시간을 버텼을지 모르겠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늘 생각했다. 만약 나라면 앞장서서 시대가 변화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소시민들처럼 나 역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그리고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살았을지 모르겠다. 친일파들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쩜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변신을 꾀한 카멜레온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결국 우직하고 미련하고, 대쪽 같은 사람들만이 시대의 변화에 어쩌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을 수도.. 그러면서 강사는 말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친자본주의’인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돈으로 움직이고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그런 우리가 친러나 친미, 친일인 사람들을 욕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대 놓고 돈이 좋다고 말한다. 그게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하지만 정당하지 못한 돈까지 좋아하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의 돈이라는 게.. 어쩜 무수한 노동자의 피눈물은 아닐까?
JTBC에서 ‘송곳’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다. 드라마의 원작이기에 아이와 함께 읽고자 이 책을 샀다. 이 책의 배경은 지금부터 약 10년 전, 프랑스계 대형 마트인 ‘푸르미’를 배경으로 한다. 푸르미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수인은 어느 날 직원들을 부당해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수인은 ‘지켜야 할 규칙과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군인이었지만 군대 내 부조리와 부패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그만둔 사람이었다. 이런 수인이 다시 잡은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을 해고하라 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수인에게 세상은, 사람들은 그를 기분 좋게 바라보지 못한다. 세상과 부딪히고 불화(?)하는 인물이 그들 입장에선 편안하지 않을 터. 수인은 ‘이거 불법입니다.’라는 말을 삼키지 못하고 드디어. 회사에 찍히게 되는데...
내가 읽었을 때엔 3권까지 나왔었는데 찾아보니 6권에서 완결되었다. 뒷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3권까지의 내용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마치 송곳으로 내 마음을 찌르는 것처럼.. 만약 수인이라는 인물이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 한 둘쯤은 금방 해고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인은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노조를 만들어 회사와 맞서기로 한다. 하지만 해고보다 어려운 게 바로 노조를 만들고 회사와 싸우는 것.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거나 물품을 정리하는 사람들 중에 중산층이 있기나 할까?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할지 모르는 그들에게 당장 입에 풀칠해야 하는데 노조에 가입하고 운동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니면, 나만 아니면 그 정도의 해고쯤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마 대부분의 내가, 우리가 그런 입장이 아닐까?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1권 213)
이게 지주랑 소작인들 사이에서 중간착취하던 마름이랑 뭐가 달라? (2권 23)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2권 63)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짐만 지세요. (3권 197)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한국 단편(1930년대 이후)을 읽다 보면 마름과 소작인의 이야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 지주는 가만히 있는데 과잉 충성하는 마름들. 그들은 소작인을 착취하고, 더 악랄하게 소작인을 부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중간 입장의 부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잘리지 않기 위해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직원들을 부당 해고하려 한다. 결코 밑에 있는 직원의 편의나 사정은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인가? 결국 우리는 자본에, 돈에 내 인생을 걸고 있는 건 아닐까? 때문에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운다는 말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높은 사람들 혹은 돈 있는 사람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에게 길들여진 싸움개와 싸우는 형국 같다고 할까?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
우리는 과거보다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마음은 황폐해지고 삶은 더 퍽퍽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친 자본주의, 친 돈을 향한 구애를 놓을 수 없다. 그게 씁쓸하고 안타깝지만 나 역시 그 주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이렇게라도 공부하고 느끼면서 나는 적어도. 너무 친 자본주의로 가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할 뿐. 이 책은 꼭 아이들과 읽고 토론해 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