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들(최지월)을 읽고
20대엔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젊음이, 이 찬란한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평생 건강하시리라 믿었던 아빠는 최근 몇 년 동안 3번의 수술을 받았다. 대쪽 같은 아빠가, 불같은 성미가 어느 순간 수그러들고, 조용해진 모습을 보면서 나를 대입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 것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인가... 삶에 지나치게 고집부리지 않고, 순리를 따르고 싶지만... 죽음 앞에 혹,,, 욕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닌지 나를 뒤돌아본다.
평온한 아침 9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가 죽었어.”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의 응급실. 그곳에서 주인공 석희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소비하는 행태를 보게 된다. 무슨무슨 상조회의 고객이 아니면 죽은 사람을 마음대로 보낼 수 없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나니 신부전을 앓고 있는 노인이 된 아버지가 남았다. 평생 집안일은 해 본 적 없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위적인 군인이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내로 산 엄마를 먼저 보내고서야 석희는 엄마를 돌아보게 된다. 호주에 있는 언니는 화상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바쁜 동생 은희는 회사 일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왕래할 수 없다. 작가인 둘째 석희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자주 돌보게 되면서 부딪히고 상처 받기 시작하는데... 둘째이기에 받는 가족 내의 상처와 언니와 동생 사이에 치여 사랑과 내 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석희. 과연 그녀가 모질고 못된 것일까? 준비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데...
나도 1남 3녀 중 둘째 딸이다. 위아래로 치이는 게 장난 아니었던 나는 그래서 둘째 특유의 날카로움과 이기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을 빼앗기지 않았고, 추진하려 마음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고집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내 모습이 인정사정없고, 냉정하고 차갑다고 말했지만 어찌 보면 그건 살기 위한 내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나는 따스하고 편안한 스타일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인상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유순하고 착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끔 엄마는 말씀하신다. “그래도 부모 생각하고 큰일에 척척 돈을 쓰는 건 너뿐이라고.” 자잘한 정은 없을지도 모르는 나지만 그래도 부모님 앞에선... 든든한 딸이고 싶은 나였던 모양이다.
친정 근처에 살지 않는 나에게 어느 날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장염에 걸려 거의 초주검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것. 그 정신없던 하루를 아빠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혹 그런 아빠를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던지...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일주일 가까이 입원 치료 후 지금은 좋아지셨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슬퍼할 짬도 없이 장례식장에는 몇 명의 사람이 오고, 하얀 국화꽃은 어떻게 할 것이고, 사진과 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든 것이 돈과 연관되어 일을 진행한다. 석희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를 위해 돈을 쓰는 게 인색하다. 100명도 오지 않는다며 가장 작은 방으로 정하고, 육개장과 반찬 그리고 떡과 과일도 가능하면 적게 그리고 생략하려 한다. 죽은 사람 앞에서 더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내내 씁쓸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혹 내가 먼저 죽게 되면... 호화롭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돈 때문에 인색하게 날 보내지 말아 달라고...
또한 죽음은 죽음 자체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까지도 말소당해야 죽음이 완성된다는 말에 마음 한편이 아파온다. 사람의 죽음은 신체의 기능 정지라는 자연의 현실과 사회적 인격의 소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련의 사건이다. 죽은 사람에겐 정지한 몸의 현실에 맞춰 정신을 조정할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그걸 해줘야 한다. (17) 죽음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절차들이 쉽지 않다. 이런 절차마저 끝나고 고인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 공허함은 어떤 빛깔을 띠게 될까?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 명의 딸들. 그리고 남은 아버지가 안쓰럽기만 한 첫째와 셋째 딸. 정작 곁에서 자잘한 일을 도와주는 건 둘째 이면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식들도 모두 같은 양의 사랑을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어떤 것이 효도인지, 이제는 효도의 정의도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석희가 아버지에게 사전 의료 의향서를 건네는 과정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연명 시술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 조금은 잔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식들도 죄책감이나 부담감이 덜 할 테니까.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내 죽음 자체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내 죽음에 대해 글로 써서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야 남은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혹 엄마가 죽으면....”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남편에게 장례 관련 문제로 넌지시 얘기했을 때 아이들의 두려운 표정을 봤으니까.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이를 먹으면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멀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죽음이지만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났을 때의 상실감을 가능하면 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잘해야겠다. 좋은 기억이 더 많은 가족으로 남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