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스떼 요가일기>는 개인블로그에 연재했던 에세이입니다. 현재는 열심히 집콕 중입니다(흑)*
예전에 고백했듯, 나는 항상 요가에 설레는 덕후는 아니다. 어떤 날은 귀찮고 열의가 전혀 없다. 요가가 너무 좋고 동작 하나하나에 욕심이 생기는 어떤 날, 과거의 나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수련할 뿐이다. 마음이 붕 떠서 열정은 가득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아쉬운 것도 드무니까.
그 날은 생리를 며칠 앞두고 있던 상태였다. 컨디션도 좋지 않았고, 집에만 있던 통에 에너지 자체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가서 몸만 움직이고 오자, 하는 마음으로 요가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따라 유난히 수강생이 북적이는 것이었다. 원래 선생님은 맨 앞 줄에 서서 거기서만 수업을 진행하셨는데, 많은 수강생들을 케어하기 위해서 수련실을 분주하게 옮겨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범동작은 수련실 양 벽 끝을 오가며 선보이셨다.
덕분에 벽 바로 옆에 자리를 틀고 있던 나는 선생님의 집중 케어 대상이 되어 자세를 하나하나 교정받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 날은 정말 몸만 움직이는 데에 그치고 싶은 날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몸을 앞으로 숙여 발날을 잡는 전굴자세의 경우, 나는 발목만 잡고 버티고 싶었다. 하지만 내 어정쩡한 자세는 선생님의 눈에 띄고 말았고, 그녀는 내 굽은 허리를 평평하게 세워 앞으로 쭉 당겨주었다. 발 아래로 상체가 시원하게 내려갔고 내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어어어... 아! 아!"
그 소리는 "제발 저를 돌보지 말아주세요" 하는 일종의 SOS신호였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한계는 누가 정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까지 이렀다.
한계 규정의 무서움은 벼룩 이야기, 코끼리 이야기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벼룩의 경우 좁은 병에 넣고 두꺼운 책을 덮어 몇시간 내버려두면, 처음에는 탈출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자신이 저 책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이상 뛰지 않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책을 치워두고 입구를 열어둔 채로 있어도 벼룩은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병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코끼리도 마찬가지다. 서커스의 거대한 코끼리들은 그들의 덩치에 비해 너무도 연약한 나무에 발이 묶여있다. 마음만 먹고 조금만 힘을 주어 당겨도 밧줄은 풀린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그 나무에 매달려 있었고, 힘이 없던 그 시절 실패했던 경험이 학습된 탓에 어른 코끼리가 되어서도 도전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A가 벼룩이나 코끼리처럼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과제를 이미 한계 지어 놓고 도전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 전문가가 A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과제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A는 전문가가 시범을 보이는 강의를 듣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것이 A가 전문가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행동을 교정해달라고 동의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제의 해결 여부에 영향을 받는 것은 A다..
영화 <위플래시>에서 스승이 제자를 한계까지 밀어붙어 역량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가 스승을 만나지 않았다면 스스로가 그 곳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모르겠다. 복잡하다. 분명한 것은 내일 근육통이 온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