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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Jul 14. 2019

아픔이 지워버린 행복한 기억들

결혼을 앞두고 여기저기 흩어진 제 물건들을 찾아내어 짐을 꾸리던 중 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옷 장 속 깊은 곳에 보관해두셨던 앨범 두 권을 꺼내어 주셨습니다. 네 물건이니 이제 네가 가져가라고, 네 사진만 추려내어 정리해두었다 말씀하시면서요. 우리집에 이런 사진이 있었나 싶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어릴적 제 사진들로 가득 채워진 앨범이었습니다. 깔끔하게 하의를 탈의한 채 온 집안을 누비는 사랑스러운 꼬마 장군의 모습부터 원망조차 아까워 지워버리려 애썼던 ‘아버지였던 사람’의 어깨위에 앉아 미소짓고 있는 어린 시절의 제 모습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린 시절의 저는 꽤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앨범을 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던 제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장남이셨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소위 3대 독자로 온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었다. 온 집안 식구들의 귀여움과 이쁨을 독차지했었고 특히 할머니께서 너를 너무나도 사랑했단다.”      


어린시절의 상처와 현실의 어려움으로 어둡게 왜곡되어버린 성장기의 기억들 중, 유일하게 빛으로 남아있는 인물 할머니를 떠올려봅니다. TV에서 흘러나오던 ‘칠갑산’이라는 노래가사를 좀 받아적어 자기에게 전해 달라던 할머니. 글을 쓸줄 모르셨던 할머니를 대신해 열심히 받아적던 ‘칠갑산’의 노랫말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제 머릿속 깊숙이 남아있습니다.    

  

 콩밭 매던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 마다 눈물 심는구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여린 가슴속을 채웠소     


지금 떠올려보니 꼭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36년에 태어나 온갖 고초를 맨 몸으로 겪어내며 5남매를 길러야 했던 할머니. 가슴 속 새겨진 상처들이 덧나고 덧나 아픔조차 느끼기 힘들 딱딱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셨지만 저에게 만큼은 너무나도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할머니의 전폭적 지지덕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로 자라 주변 사람들을 꽤나 힘들게 했지만 찬바람 쌩쌩부는 북극같던 제 어린 시절의 기억 속 한줄기 따뜻한 빛으로 남아계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종일 곱씹어 보았습니다. 트루먼 쇼의 한 장면처럼, 내가 아닌 제 3자가 되어 어릴 적 기억들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내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겠구나싶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사업을 말아먹고 보증을 선 어머니께 큰 빚을 안겨 평생을 고생하게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남은 전부인데,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에선 분명 나를 앉고 넘쳐흐르는 사랑을 가득담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겠지요. 평생 제게 칭찬 한번 시원하게 하신 적 없어 인정욕구의 결핍에 허덕이게 만드신 어머니도 내가 없는 자리에선 내 칭찬에 시간가는 줄 모르시며 저를 떠올릴 때마다 입이 귀에 걸리는 분이 신 것도 이제는 압니다. 제 아내 앞에서 그렇게 제 칭찬을 하시는데도 정작 제가 나타나면 몸을 휙 돌리고 자리를 떠버리시는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아내가 자꾸 하더라구요.     


아픔이 왜곡하고 지워버린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입을 통해 되찾은 그 기억들이 일그러진 나의 어린시절을 새롭게 합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는 이야기를 섣불리 못하게 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차가움이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는 자각이 찾아옵니다. 흔적은 그대로 인데 그 흔적을 바라보는 내가 바뀌니 흔적의 의미가 달라지네요. 이런 것이 변화일까요. 아, 성장인가 봅니다.    

      



인생은, 정말, 현자들 말처럼

어두운 꿈은 아니랍니다

때로 아침에 조금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

어떤 때는 어두운 구름이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재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밝은 시간은 가버리죠

고마운 맘으로 명랑하게

달아나는 그 시간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어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짓누르는 것 같으면 또 어때요?

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서거든요

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

힘있게 우리를 잘 버텨주죠     

씩씩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

영광스럽게, 그리고 늠름하게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인생 / 샬롯 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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