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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에다 인싸가 될 수 있다고?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애덤 스미스/러셀 로버츠, 세계사 ]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애덤 스미스/러셀 로버츠, 세계사 ] 


나와 남, 그 자음 하나 차이에 관하여.


 시대의 전환점에서는 언제나 역사적인 인물들이 탄생하는 법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근대의 땅에서 현대의 기둥을 세워나간 두 거성이 있었다. 

 한 명은 [ 자본론 ]의 저자 칼 마르크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 국부론 ]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의 두 걸작은 오늘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고, '역사를 만들었다'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유명세만큼 그들이 주는 이미지 역시 더없이 확고했다. 특히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선보이며 시장의 자유를 주장한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빈부격차에 따른 고통에는 무관심했을 것이라는 편견 또한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이런 생각은 [ 내 안에서 나를 만나는 것들 ]을 통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 책의 원저 [ 도덕감정론 ]은 스미스가 죽을 때까지 6번이나 개정했고, 그의 묘비명에도 등장했을 만큼 저자가 사랑했던 책이다. 그리고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가 이를 현대에 맞춰 재해석해 내놓은 것이 바로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곳에서 [ 국부론 ]에서 주장했던 내용과는 다소 반대되어 보이는 주장을 드러낸다. 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이 '자본주의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관계'와 '행복한 삶'에 대해 듣고 싶어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 도덕감정론 ]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 개념은,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공정한 관찰자'라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것을 내가 이해한 바로 표현하자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나' 정도가 될 것 같다. 언뜻 들으면 이는 모순적이다. 어떻게 내가 나를 바라보는 데, 완벽히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를 내면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개념은 양심을 뜻하는 게 아니다. 양심은 스스로를 속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모서리가 닳아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공정한 관찰자는 내 자아 안에 전혀 다른 '타인'을 갖다 놓는 것이다. 그는 내 행동에 일일이 피드백을 해주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결말과 상대방의 입장을 대신해 말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행동하기 전 한차례 숙고할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관계의 갈등을 최소화하게 된다. 


 삶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것. 스미스는 이것만으로도 공정한 관찰자가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공정한 관찰자는 개인의 '도덕성'을 지켜나가는 데도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선행과 나눔'을 강력하게 권한다. 혹시 애덤 스미스가 자신의 재산 중 많은 부분을 사회에 기부한 것을 알고 있는가? 이익 추구의 자유, 사유재산을 강조했던 그가 타인에게 베풀었다는 사실이 약간은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공정한 관찰자가 자신을 자기 합리화에 빠지지 않게 막아주었기 때문에, 봉사와 베풂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혼자만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식물이 흙에서 영양분을 얻고, 동물이 식물로부터 힘을 얻어 살아가듯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경제라는 '생태계'를 순환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공정한 관찰자는 이를 항상 우리에게 인지시켜주고, 무한 이기주의에 빠지려는 것을 막아준다. 심장이 뿜어낸 피가 온몸을 한 바퀴 돌며 모든 신체기관은 물론 자신에게도 생명을 불어넣듯,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결국 나에게도 이득인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 과정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모호한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남의 이익이 곧 나의 이익이라는 '상호 이익'을 삶의 원칙으로 정하라 말한다.

 스미스가 주장한 이 새로운 개념은. 결국 인간관계와 행복한 삶이 '하나'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공정한 관찰자를 통해 우리는 남과 나를 동시에 위하는 법을 배우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행복감을 만끽한다. 이 선순환은 우리에게 도덕이 반드시 이타적인 것도,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기적인 것도 아님을 가르쳐 준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공정한 관찰자와 칸트의 '정언명령'이 서로 비슷하다고 느꼈다.'타인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라고 말했던 칸트와 애덤 스미스는 각각 그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론적으로 모두 타인을 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고매하신 철학자께서 이것이 틀렸다고 지적한다면 반박할 자신은 없지만, 이 두 위대한 성인이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러셀 로버츠는 애덤 스미스가 18세기의 사람이지만 그가 남긴 생각들은 현대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니, 오늘날은 인간관계가 더 넓고 다양해진 만큼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한국이라는 잔인한 경쟁이 곧 상식인 곳에서 애덤 스미스는 내게 '우리'라는 단어의 온도를 다시 깨우쳐주었다.

 이 대 실업 시대, 한 명의 취준생으로서 얼마 전 씁쓸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 은행 등에서 소위 '상류층'분들의 자제를 특혜로 채용했다는 기사이다. 그들은 오직 잘난 부모를 만났다는 사실 하나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정당함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자본주의는 적어도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인의 노력이 온전하게 인정받고, 자신이 얻은 만큼 또다시 남에게 베푸는 사회를 꿈꿨다. 이 위대한 사상가가 세상에 태어난 지 삼백여 년. 우리는 다시 초심을 돌아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은 우리에게 애덤 스미스의 이 절절한 외침을 들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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