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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지혜 ]


[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지혜 ]


실패할 수 있는 권리.


 꽃·1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청춘이라는 시간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나이가 아무리 많더라도 마음만 싱그럽다면 청춘이다,라는 등의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실패하더라도, 주저앉더라도 너는 아직 괜찮다며 용납되는 시기는 언제까지일까가 궁금한 것이다. 이제 25번째 겨울을 기다리는 이날, 문득 내게 찾아온 의문이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청춘의 유통기한이란 각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문화의 우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청춘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솔깃한 정보이지 않을까 싶다. 간단히 내 생각을 표현하자면 '자유'를 가장 중요시하는 유럽과 서구 문명이 가장 청춘의 유통기한이 길고, '종교'를 가장 중요시하는 중동과 아프리카 문명이 가장 짧으며, 우리를 포함한 동양권이 중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중간 정도에서도 대한민국은 그 기한이 왼쪽(-)에 더 치우쳐 있을까, 오른쪽(+)에 더 기울어 있을까?

적어도 요즘 뉴스를 보면, 그 저울의 기울기 방향이 결코 오른쪽은 아닌 것 같다. 초등학생들의 꿈 1순위가 '공무원'인 사회에, 청춘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치스럽다는 인식까지 만연해있는데 누가 한국의 청춘은 방부제를 넣은 것처럼 길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취업-결혼-출산-육아-퇴직이라는 대한민국의 '절대 공식'에서 청춘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꽃·1', 이 시를 읽으며 이런 우리의 사회에 안쓰러움과 슬픔을 느꼈다.

                             

 다시 한번만 사랑을 하고 싶다. 다시 한번만 스스로에게 나태와, 실수의 죄를 짓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쟁이처럼, 다시 시작해 보라는 '용서'까지 받고 싶다. 그러나 이런 따스한 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다. 지구 온난화로 한반도에 여름과 겨울만이 남게 될 거라지만, 한때의 '푸른 봄'마저 대한민국은 젊은이들로부터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비극의 원인을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은 독후감이지 논문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른 봄을 한껏 누리고 싶은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이 시를 읽고 느낀 가장 큰 감정이 '슬픔'인 것에는 토를 달지 말아 줬으면 한다. 언제쯤에야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당당한 실패'를 누릴 기회를 얻게 해줄까. 씁쓸함이 입안에 가득 감도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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