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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은 어머니께

[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달 ]


[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달 ]


그러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에 빗대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선지, 아님 그저 그 표현들이 순수하게 아름다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너는 예뻐'보다는 '너는 마치 첫눈처럼 예뻐'가 훨씬 듣기 좋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그것의 가치는, 차고 넘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자신을 자연에 빗댄 시인이자 작가가 있다. 이제 60대에 접어드는, 귀가 순해져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장석주 시인은 이제야 자신이 인생의 '오후'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도전하기에도, 체념하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나이. 그는 이 막연한 시간의 매력에 대해 '오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 오후의 가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함에 대하여 살갑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는 장석주 시인의 인생 그 자체를 비춰주는 '연못'과 같다. 그가 써 내려간 문장들에는 약간의 아쉬움과 슬픔도 배어있지만, 무화과의 달콤 쌉싸름같이 읽는 이에게 조그마한 웃음을 계속 머무르게 만든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주제를 다룬다. 아니, 주제는 너무 거창하고 딱딱하게 들린다. 그는 이 책에서 수많은 '혼잣말'을 쏟아낸다. 풍경, 햇볕, 떠돎, 혼자, 노스탤지어, 배움, 숲, 시간, 단순함, 도서관, 멸종, 해바라기와 국화와 석류 그리고 인생까지……. 

 사색의 끝에서 나온 이 글들은, 내게 또 다른 사색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이 책의 구성은 독서의 맛 또한 질리지 않게 해주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5부 '기억하다'를 이루는 것들 중 하나인 '어머니에 대하여'이다. 그는 공들여 세운 출판사를 접고 실의에 빠진 채 시골로 내려온다. 먹고사는 궁리에 바쁜 와중에 같이 귀향한 그의 노모는, 조그만 텃밭에 갖가지 채소를 심어나간다. 그리고 잡초들이 무성했던 그 공간은 색색의 잎들로 채워져 나간다.

 소녀같이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며, 저자는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어머니가 위독해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텃밭은 다시 황폐해진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유일한 내 편이었을 그녀를 떠나보낸 후, 작가는 자신의 키만큼 자라난 잡초들을 바라보며 어머니에 대한 추억에 잠긴다.


 그는 여기서 절절한 슬픔을 수십 가지의 묘사들로 덧칠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가 느끼는 깊은 감정은, 우리에게 바닥부터 스며들어 전해져온다. 만남보다 이별이 많아지는 시기에 들어선 작가에게, 어머니와의 이별은 자연스러운 인생의 한 단계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격렬하되 드러나지 않는 슬픔,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에 접어든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이 책에서 말한다.

 나는 장석주 작가에 비하면 아직도 어린애일 뿐인 나이에 있다. 그가 지금 오후의 고요한 햇살을 느끼고 있다면, 나는 눈부신 일출 속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언젠가 정오를 넘겨 오후의 시간대에 살아가게 될 그날, 나는 지금의 스스로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시간에 대하여 궁리하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래의 내가 지금의 시간을 찬란하게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20대는 청춘의 시간이라고 다들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들인 내 주변의 20대들 중에는 자신이 청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하루를 버티기도 버거운 현실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미래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나와 같은 청춘의 수혜자들은, 매일매일 원하지 않는 공부와 일에 치여 살아간다. 이것이 훗날의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 맹신하며 말이다. 그러나 하나 묻고 싶다. 과연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그날, 뜨거운 햇볕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만큼 자신의 청춘이 값지게 희생되었다고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살아가며 느낀 것은 인생의 어떤 부분이든, 어떤 시간이든 '지금'보다 힘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객관적으로 다른 일보다 낫다 해도, 우리는 계속 힘들다고 불평할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미래는 아직 겪지 못했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느끼는, 어디까지나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미래에도 어차피 지금과 같이 힘들 것이 분명하다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적어도 이 책에서는 '열심히만' 살았던 과거에 대한 장석주 작가의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젊었을 적 왜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일에만 빠져 살았는지. 왜 쉼표를 찍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또 사람을 왜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무수한 숫자들 중의 하나로 여긴 것인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작가 역시 잃어버린 젊음에 대해 후회를 느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는 미래만큼이나 현재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미래를 홀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내 미래가 행복할 권리가 있듯이, 현재의 지금 나 자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먼 훗날, 찾아올지 확실하지도 않은 행복만을 좇기에는 지금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내 인생의 봄은 지나가면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나중에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그리워한다 해도. 

 그렇기에 나는 이 '아침의 찬란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다. 구석구석 비쳐오는 햇살과 아직은 차가운 새벽의 숨결을 살갗으로 느끼며, 다음 인생의 단계로 넘어갈 때까지 행복해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그것이 오후와 저녁을 거쳐, 밤의 입구에 머물게 될 내가 활짝 웃을 수 있는 방법이라 굳게 믿으며 말이다.


 오늘의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일의 내가 바라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얼굴을 찌푸릴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위로와 함께 조용한 미소를 전해주어야 한다. 

 이런 태도에 물든 채로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미래가 되면 언젠가 이 세상에서 맞이할 마지막 순간. 나는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는 하루의 처음을 맞이하는 내게 시작과 끝을 대하는 자세가 결국엔 같아야 하는 것임을, 나지막하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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