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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아닐지라도

[ 죄와 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


[ 죄와 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열린책들 ]


당신은 진정 '특별'한가.


 어릴 적,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매일 무릎에 흙먼지가 떨어져 나간 적이 없던 나날, 나는 사람들을 갖가지 위기에서 구해주고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런 사람을 꿈꿨다. 그 시절에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없어 보였고, 세상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찬란한 미래는 점점 나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으며, 설렘과 함께 잠에서 깨던 나날은 어느덧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결코 특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위 세상의 '주인공'들은, 특별할 권리를 애초에 지니고 태어난 것은 아닐까.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로 불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 죄와 벌 ]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라스콜리니코프'라는 가난한 대학생의 방에서 시작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법대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현재는 등록금이 없어 강제로 공부를 쉬고 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을 위해 애쓰며 돈을 벌고 있지만, 실상은 생계비도 부족한 형편. 그럼에도 그들은 오직 라스콜리니코프만을 바라보며 언젠가 그가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를 옥죄는 갖가지 현실을 생각하며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가지 '계획'을 떠올린다. 세상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그러나 오직 그만이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을.


 그는 생계비를 벌기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기며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까지 맡기고 나자, 그에게 남은 것은 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그는 전당포 노파가 여동생과 둘이서만 살고 있으며 여동생이 내일 저녁 집을 비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 노파의 악독함을 되새기며, 그녀가 세상에 끼치는 여러 죄악들에 대한 '응징'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결심한 날, 하늘이 마치 그를 도우려는 듯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 그리고 목격자가 없는 시간대를 손쉽게 알아낸다. 그리고 그가 결국 노파의 조그마한 머리를 도끼로 사정 없이 내리칠 때, 그녀의 동생 '리자베따'가 예상외로 일찍 들어와 그를 발견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마저 죽이고, 금품을 훔쳐 도주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물증이 없고, 판사 '뽀르피리'가 심증만으로 그를 의심하는데도 스스로의 죄책감으로 죽도록 괴로워하며 서서히 미쳐간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몸을 팔아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창녀 '소냐'를 만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보다 힘든 삶을 살면서도 희망을 품고 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큰 혼란을 겪는다. 과연 그는 양심이라는 스스로의 '짐'을 떨쳐낼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로 작가로서의 성숙기를 맞이했다는 극찬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이 단순한 줄거리에 담아낸 / 수많은 상반되는 시각 덕분이다. 현실과 이상, 이기심과 이타심, 이성과 본능 등 한없이 본질적이고 추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은 '라스콜리니코프'라는 한 가난한 대학생을 통해 모두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작가는 수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이 책을 써냈다. 그래서인지 그는 염세주의적이라 보일 정도로 차가운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주목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는 가난한 이들이 모여드는 도시로,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끝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작가는 이러한 면모까지 소설에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라스콜리니코프가 왜 살인이라는 범죄에까지 이르게 되는지, 또 그가 이를 정당화시키면서 어떤 모순이 발생하는지까지 라스콜리니코프의 목소리를 통해 모두 보여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스스로에 대해 '정의'하는 순간이었다. 판사인 뽀르피리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에게 계속해서 범죄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애쓸 때, 죄책감에 짓눌리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예전에 작성한 논문을 근거로 '범죄란 어떤 이들에겐 범죄가 아닐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조금 더 진보시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극소수의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늘로부터 그러한 권리를 부여받고, 당시에는 폭군이라 불려도 역사에는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다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예로 나폴레옹을 들며 그러한 이들에겐 폭력이 범죄가 아닌, 세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각은 노파를 죽인 후에 중얼거리는 한 대사로 정점에 이른다. 

 "나는 그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아무 쓸모도 없고 더럽고 해롭기만 한 이를."


 이 책을 읽는 모두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누구도 타인을 해칠 권리는 없고, 어떤 영웅이라 해도 그런 권리를 부여받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다른 한편, 라스콜리니코프가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에 대해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된다.

 현실이 어떠한 탈출구도 허용하지 않은 채, 라스콜리니코프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이들까지 같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그런 주인공에게 더 이상 자신을 탓할 수 있는 용기는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라는 끝없는 희생을 실천하는 인물을 만나고, 그의 논리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또한 자연스레 알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영웅'의 정의를 세상의 발전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했느냐 따위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없애는 한이 있어도 양심을 지켜나가는 희생적인 인물, '소냐'를 영웅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의가 옳다고 생각될 수도, 소냐의 정의가 옳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나'를 끊임없이 억누르는 현실에 옳지 못한 방법이라도 저항하는 것과, 모든 것에 순응하며 끊임없이 희생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운지 역시 모두에게 달리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 죄와 벌 ]을 읽고 깨달은 것은, 어떠한 선택을 하든 나는 나의 '양심'에게서만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누리고 매일이 희망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에서만은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믿고, 삶의 끝까지 묵묵히 걸어나가는 이들은 많다. '특별'해지기 위한 삶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그 고민을 라스콜리니코프 그리고 소냐와 함께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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