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도덕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지는 한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다들 《도덕경》하면 무위자연을 생각하시죠. 저도 처음에는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위자연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도덕경》을 이해했었죠. 그런데 몇몇 구절이 가슴에 턱턱 걸리면서 명료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무無와 관련해서는 2장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는다(유무지상생야有無之相生也).
없음은 없음인데 어떻게 무엇을 낳는다는 말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죠? 그런데 이에 대해서 기존에 나와 있는 해설서에는 딱히 논리적으로 명료한 설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해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고 있는데, 어느 책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무로부터의 우주
무로부터의 우주라니, 그럼 없음으로부터 우주가 생겨났단 말인가? 저자는 로렌스 크라우스라는 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출판사는 승산. 수학과 과학책을 주로 내는 출판사였습니다. 사이비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노자에 나오는 무無에 대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고 책장을 덮은 순간,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無라는 거야, 뭐야?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도 결론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무라고 주장하는 것을 신학자들은 양자요동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봐도 그게 진짜 무無인지 잘 이해가 안 되더군요. 왜 신학자들이 끼어드냐면, 무로부터 우주가 생겨났다는 것이 인정되면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필요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과학 논쟁에 신학자가 참여하더군요. 그래도 저자는 양자요동을 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여튼, 결론은 과학으로 노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여전히 없음으로부터 어떻게 있음, 물질, 우주가 나올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노자가 말한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낳는다’에 대한 이해는 정작 《도덕경》 2장에 나오는 것들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2장을 읽어 봅시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추함일 수도 있다.
모두 선으로 알고 있는 것을 선이라 여기는데
그것은 선하지 않음일 수 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룬다.
긺과 짧음은 서로 죽이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사라지게 한다.
음音과 성聲은 서로 조화하며,
앞과 뒤는 서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물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생성하되 다투지 않으며,
이루되 뽐내지 않는다.
이뤄도 머무르지 않는다.
오로지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떠나지 않게 된다.
천하개지미지天下皆知美之
위미야爲美也,
아이亞已.
개지선皆知善,
차기불선의此其不善矣.
유무지상생야有無之相生也,
난이지상성야難易之相成也.
장단지상형야長短之相刑也,
고하지상영야高下之相浧也.
음성지상화야音聲之相和也,
선후지상타야先後之相堕也.
성인거무위지사聖人居無爲之事,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教.
만물작이불시야萬物作而弗始也,
위이부지야爲而弗志也.
성이불거成而弗居,
부유불거야夫唯弗居也,
시이불거야是以弗去也.
- 2장
2장을 읽어 보시면 그 뜻이 서로 정반대인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선하지 않음,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音과 성聲, 앞과 뒤, 머무르지 않음과 떠나지 않음이 그것입니다. 음音과 성聲의 뜻이 왜 정반대냐고 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는데요, 음은 음절이라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끊어지는 소리를 뜻하고, 성聲은 이어지는 소리를 뜻합니다. 끊어지는 소리와 이어지는 소리는 서로 정반대죠. 이외에도 《도덕경》에는 서로 뜻이 정반대인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래 문장들을 보시죠.
성인은 그 몸을 뒤로 물리는데도 오히려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멀리하는데도 오히려 보존된다. - 7장
굽힘은 곧 온전함이요, 구부러짐은 곧 바름이다. 움푹함은 곧 채움이요, 낡음은 곧 새로움이다. - 21장
장차 오그라뜨리려거든, 반드시 먼저 펼치게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만들며, 장차 제거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함께하고, 장차 뺏으려면 반드시 먼저 베풀어라. 이것을 일컬어 어둠과 밝음이라 한다. 부드러움과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 35장
화禍는 복福이 기대어 있고, 복福은 화禍가 엎드려 있다. - 58장.
이 문장들에는 다음과 같은 서로 정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룸 ↔ 모자람
가득 참 ↔ 텅 빔
교묘함 ↔ 서툶
넉넉함 ↔ 부족함
곧음 ↔ 굽음
굽힘 ↔ 온전함
구부러짐 ↔ 바름
움푹함 ↔ 채움
낡음 ↔ 새로움
오그라뜨림 ↔ 펼침
약 ↔ 강
제거 ↔ 함께 함
뺏음 ↔ 베풂
어둠 ↔ 밝음
화禍 ↔ 복福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즉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는 범주(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룬다”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습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를 낳고 이룬다.
반대되는 것들이 정말 서로를 낳는지, 노자가 말한 반대되는 것 중 앞뒤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아래 사진을 보세요.
이 조각은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헤지레의 초상>이라고 합니다. 이 조각을 보시면서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시나요?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처음 보시는 분들은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시나요? 모르시겠다면 다음 쪽에 있는 그림을 자세히 보고 오세요. 뭐 그래도 모르시겠다면, 저와 같은 과이신거죠. 뭐가 같냐고요? 둔한 거죠. 저도 설명을 듣고 알았지 그냥 봐서는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더군요.
위 사진을 보시면 얼굴은 옆 모습을 새겼죠? 그런데 눈은 어떻죠? 사람 얼굴을 옆에서 보면 눈 모양이 또렷하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저 눈 모양은 눈을 정면에서 본 모양이죠. 그리고 가슴과 배를 보시면 정면에서 봤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팔과 다리는 걸을 때 옆에서 본 모습을 새겼습니다. 독특하죠. 아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은 측면, 눈은 정면, 배와 가슴은 정면, 팔과 다리와 발은 측면에서 본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를 ‘정면성의 원리’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왜 정면성의 원리라고 하냐면 이집트인들이 사물의 본질을 잘 드러내기 위한 방향에서 사물을 그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정면은 우리가 아는 그 정면이 아니라 본질을 잘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정면입니다. 그러면 정말 정면이 본질을 잘 드러내는지 살펴볼까요.
우리는 흔히 인체의 몸통 중에서 배와 가슴을 앞이라 합니다. 그런데 배와 가슴을 앞이라 하는 순간 등은 뭐가 되죠? 네. 뒤가 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등을 앞이라고 해봅시다. 그럼 배와 가슴은 뭐가 되죠? 네. 배와 가슴은 뒤가 됩니다. 이번에는 먼저 배와 가슴을 뒤라고 해봅시다. 그럼 등은 앞이 됩니다. 이상하게도 제가 한쪽만을 말했는데도 동시에 반대쪽의 이름이 정해집니다. 앞이라고 말하면 뒤가 정해지고, 뒤라고 말하는 순간 앞이 정해집니다. 앞이라고 말하는 순간 동시에 뒤가 정해진다면 이는 뒤가 먼저 등장한 앞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인基因이란 ‘기초가 되는 원인’, ‘어떠한 것으로부터 말미암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원인과 같은 단어입니다. 뒤가 앞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은 앞이 뒤의 원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인이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앞이 뒤의 원인이므로 앞이 뒤를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이 뒤를 낳는다면 반대로 뒤도 앞을 낳습니다. 앞이 뒤를 낳고 뒤가 앞을 낳는다면 앞과 뒤는 서로를 낳는 것이죠. 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즉 반대되는 것은 서로를 낳습니다. 앞은 뒤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배와 가슴은 등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몸통 중에서 배와 가슴이 중요합니까? 등이 중요합니까? 둘 다 중요한 거죠. 그렇다면 배와 가슴이 정면, 즉 본질입니까? 등이 본질입니까? 둘 다 본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2장에 등장하는 예 중 높음과 낮음을 가지고 살펴봅시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한 사람은 굉장히 키가 크고 다른 사람들은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키가 크다, 작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키가 높다, 낮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여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키가 높고, 그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키가 낮습니다. 그런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키가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맞은편에 있는 사람의 키가 낮기 때문입니다. 즉 앞 사람의 키가 낮기 때문에 가운데 있는 사람의 키가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림에 가운데 사람만 그려져 있거나 모든 사람의 키가 같다면 아무도 저 사람을 가리켜 키가 높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높음은 낮음이 낳습니다. 반대로 낮음은 높음이 낳으므로,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낳습니다. 키가 크다, 작다로 표현해도 마찬가지죠. 크다와 작다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누구는 크고 누구는 작게 그린 이유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키가 큰 사람은 지배층, 작은 사람은 피지배층을 의미합니다. 그러고보니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군요. 그렇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서로를 낳는 관계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은 어려움과 쉬움에 대해 살펴보죠.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입니다. 유치원생 아니 그보다 어린아이들도 알 정도로 참 쉽죠. 그리고 여기 파동 방정식 이 있습니다. 대학들을 나온 어른들에게 풀어보라고 해도 못 풀 정도로 어렵습니다. 1+1과 파동 방정식을 비교하면 1+1과은 쉽지만 파동 방정식은 어렵습니다. 1+1의 쉬움은 파동방정식의 어려움이 낳고, 파동방정식의 어려움은 1+1의 쉬움이 낳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원래 쉬운 것 아니냐, 그러니까 비교하지 않을 때도 쉬운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없으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존재하는 수학 문제가 1+1정도의 덧셈 문제라면 수학 문제를 두고 어렵다, 쉽다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비교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닌 다른 것과 비교한다는 것이죠. 만약 1+1이 아닌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학을 두고 쉽다, 어렵다는 개념이 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1이 아닌, 확률과 통계, 미적분 같은 수학이 존재하므로 1+1이 쉽습니다. 즉 노자는 반대되는 것이 있어야 사물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것만 존재하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살펴보시죠. 우리는 배우 이영애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배우 이영애가 혼자 아름다웠나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배우 이영애의 얼굴과 같다면 이영애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까요? 아닐 겁니다. 배우 이영애의 얼굴이 아닌 예를 들어 제 얼굴이 있기 때문에 이영애의 아름다움이 생겨나는 겁니다. 배우 이영애의 얼굴과 제 얼굴을 비교하면 이영애는 아름답고 제 얼굴은 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얼굴의 추함은 이영애 얼굴의 아름다움이 낳았고, 이영애의 아름다움은 저의 추함이 낳았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를 낳습니다.
지금까지 설명을 들으면서 높음과 낮음, 앞과 뒤, 아름다움과 추함이 상대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으셨죠? 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처럼 지금까지 노자 연구자들도 2장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높음과 낮음, 긺과 짧음,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낳는다는 문장을 ‘상대적인 관계에서 관념 속에서만 생겨난다‘고 설명해왔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은 맞습니다. 상대相對라는 단어는 ‘서로 대립하다’라는 뜻으로, ‘서로 반대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대적이죠’라고 할 때 ‘상대相對’는 ‘상대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뜻입니다. 상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상대가 낳는다는 의미, 상대가 존재 원인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과연 이 반대되는 것들이 관념 속에서만 생겨날까요? 선과 불선, 아름다움과 추함,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은 관념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비교할 때 관념 속에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비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비교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특히 서로 반대되는 것을 비교할 때 그 비교가 두드러지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념 속에서만 생겨나냐, 실제로도 생겨나냐가 아니라 관념 속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을 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가 말한 반대되는 것이 전부 관념 속에서만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음과 성이 대표적이죠. 음은 끊어지는 소리, 성은 이어지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인간 바깥에서 발생해서 귀로 들어와 뇌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우리의 관념 속에서 생겨나나요? 아니죠? 그리고 앞과 뒤도 아니죠? 앞과 뒤는 서로 ’비교할 때 관념‘ 속에서 생겨나나요? 아닙니다. 앞과 뒤가 비교할 때 생겨나나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념 속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은 있음과 없음에 대해 살펴보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는 진정한 문제란 것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문제란 없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철학적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철학적 문제가 먼저 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문제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잘 모르시겠다고요? 헷갈리시면 책을 덮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없음은 있음으로부터 기인하며, 있음이 없음을 낳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반대로 포퍼는 ‘이 세상에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자신이 해결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포퍼가 철학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철학적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철학적인 문제란 없으며 철학자들이 말하는 문제란 논리와 수학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있음이라는 개념/단어가 등장하려면 없음이라는 개념/단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헷갈리시죠?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네. 헷갈리는게 당연합니다. 저는 없음과 있음이 서로를 낳는다에 대해 수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언어나 개념으로 보자면 있음을 말하려면 먼저 없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어나 개념을 떠나서 실제 물질에서도 그러한가라고 생각하면 없음은 말 그대로 없음인데 어떻게 거기서 물질이 생겨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뭘 깨달았냐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인지 앞과 뒤를 가지고 살펴봅시다. 앞은 뒤를 낳고 뒤는 앞을 낳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대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낳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는 한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위가 아래를 낳으려면 위가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래가 위를 낳으려면 아래가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을 낳을 수 있나요? 없습니다. 위가 존재하고 있는데 아래가 위를 낳을 수 없고, 아래가 존재하고 있는데 위가 아래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가 아래를 낳는 것처럼 보이고 아래가 위를 낳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와 아래는 원래 하나라고 설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원래 하나이기 때문에 위를 말하는 순간 아래가 동시에 출현하고, 아래를 말하는 순간 위가 동시에 출현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은 ‘동시同時’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앞과 뒤가 서로를 낳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 앞이라고 말하는 순간 동시에 뒤가 출현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죠? ‘동시同時’란 ‘같은 시간’이란 뜻입니다. 두 사건이 같은 시간에 출현하면 두 사건 간에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와 아래가 동시에 출현한다는 것은 위와 아래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즉 하나는 논리적 모순과 하나는 동시라는 단어의 의미를 통해 서로 반대되는 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낳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한쪽만 먼저 호명하거나 한쪽만 먼저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다면 동전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100원 동전의 양면 중에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있는 면을 앞면, 1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면을 뒷면이라고 부릅니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동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숫자 100이 아닌 이순신 장군 초상이 있는 면을 뒷면이라고 하면 반대면은 동시에 앞면이 됩니다. 이처럼 동전은 앞과 뒤라는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의 사물, 물질, 사건입니다. 다른 서로 반대되는 것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있음-없음, 어려움-쉬움, 긺-짧음, 높음-낮음, 앞-뒤, 아름다움-추함, 선-불선, 모두 서로 반대이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노자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노자는 하나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굽힘은 곧 온전함이요, 구부러짐은 곧 바름이다.
움푹함은 곧 채움이요, 낡음은 곧 새로움이다.
적음은 곧 얻음이요, 많음은 곧 어지러움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잡아서
천하의 목자牧子가 된다.
곡즉전曲則全, 왕즉정枉則正.
와즉영洼則盈, 폐즉신敝則新.
소즉득少則得, 다즉혹多則惑.
시이성인집일是以聖人執一,
이위천하목以爲天下牧.
- 21장
이지러짐과 완전함, 휨과 곧음, 푹 파임과 채움, 황폐함과 새로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인은 이 하나됨, 하나임을 인식하고 그것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목자가 됩니다.
옛날에 하나를 얻은 것이 있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아졌고,
땅은 하나를 얻어 안정되었고,
신은 하나를 얻어 영험해졌고,
계곡은 하나를 얻어 가득 찼으며,
제후와 왕은 하나를 얻어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말하자면
하늘이 맑기를 그치지 않으면 갈라질까 두렵다.
땅이 안정되기를 그치지 않으면 터질까 두렵다.
신이 영험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고갈될까 두렵다.
계곡이 가득 차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르게 될까 두렵다.
제후와 왕이 높이 올라 귀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뒤집어질까 두렵다.
따라서 귀해지려면 반드시 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높아지려면 반드시 낮음으로부터 기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후와 왕은 스스로를
외로운 사람, 모자란 사람, 덕 없는 사람으로 일컬으니,
이것이 바로 천함으로써 뿌리를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자주 가마에 오르면 가마가 없다.
옥처럼 록록祿祿하게 빛나기를 욕망하지 말고,
돌처럼 낙낙硌硌하라.
석지득일자昔之得一者.
천득일이청天得一以淸,
지득일이녕地得一以寧,
신득일이영神得一以靈,
곡득일이영谷得一以盈,
후왕득일이위천하정侯王得一以爲天下正
기치지야其致之也.
위천무이청謂天毌已淸, 장공렬將恐裂.
위지무이謂地毌已寧, 장공발將恐發.
위신무이영謂神毌已靈, 장공헐將恐歇.
위곡무이영謂谷毌已盈, 장공갈將恐渴.
위후왕무이귀이고謂侯王毌已貴以高,
장공궐將恐蹶.
고필귀이이천위본故必貴而以賤爲本,
필고의이이위위기必高矣而以下爲基.
부시이후왕자夫是以侯王自,
위왈고과불곡謂曰孤寡不穀,
차기천지본여此其賤之本與?
비야非也?
고치삭여무여故致數輿無輿.
시고불욕녹녹약옥是故不欲祿祿若玉,
낙낙약석硌硌若石.
- 39장
노자는 말합니다. 제후와 왕이 우두머리가 되려면, 하나를 얻어야 한다고. 그 하나는 뭐죠? 우두머리는 지배자입니다. 지배자가 지배자가 되려면 다스림을 당하는 사람, 즉 피지배자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다스림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면 제후와 왕이 우두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달랑 혼자 있는데 혼자서 뭘 하겠습니까? 제후와 왕, 피지배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없습니다. 왕과 제후는 피지배자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피지배자도 왕과 제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지배자, 즉 다스림을 당하는 사람은 왕과 제후가 없으면 피지배자라는 이름만 사라질 뿐,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왕과 제후는 아니죠. 피지배자가 없으면 존재 자체에 위협을 받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린 왕과 제후는 비참하게 죽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왕과 제후, 피지배자 중 서로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왕과 제후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왕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과인寡人’이라 한 겁니다. ‘과寡’는 ‘적다’, ‘작다’라는 뜻입니다. 과인은 적은 사람, 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 불러야 했냐면 천한 사람, 즉 피지배자가 없으면 자기도 없으니까, 피지배자와 왕은 하나니까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과인이라 부른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하고 정치를 엉망으로 해서 피지배자들을 못 먹고, 못 살게 하면 어떻게 되죠? 피지배자들이 왕을 쫓아 나거나 나라가 망하죠. 나라가 망하면 왕은 없습니다. 그래서 천함은 귀함의 뿌리가 되고, 마찬가지로 귀함도 천함의 뿌리가 됩니다. 노자는 이를 제후와 왕이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낮춰 부르면서 ‘귀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뒤집어질까 두렵다’고 표현한 겁니다. 다른 반대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은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아졌다는 무슨 뜻인지 살펴봅시다. 하늘은 맑음과 흐림이라는 서로 정반대되는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계속 맑기만 하면 흐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맑음도 맑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어떤 상태가 되겠죠. ‘하늘이 맑기를 그치지 않으면 갈라질까 두렵다’라고 한 이유는 하늘이 맑기를 그치고 흐림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하늘이 하늘로써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천체망원경이 찍은 목성 사진을 보십시오. 목성의 대기는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름이 있기는 한데 그 두께가 약 150km에 달하며 끊임없이 초속 180m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제트기류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목성 사진을 보면 우리가 하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매번 거의 비슷한 상태입니다. 지구의 하늘이 하늘로써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맑음과 흐림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흔들림과 안정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가 되면서 이루어집니다. 땅, 신, 계곡은 어떻게 하나를 얻어야만 존재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그 이치를 궁리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다음 문장을 보겠습니다.
긺과 짧음은 서로 죽이며, 장단지상형야長短之相刑也,
높음과 낮음은 서로 사라지게 한다. 고하지상영야高下之相浧也.
아마 《도덕경》을 공부하신 분들은 이 번역을 보고 당황스러워하실 겁니다. 기존에 보신 《도덕경》 책하고는 두 글자가 다르고, 그래서 문장의 뜻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위의 문장은 곽점 노자와 백서 노자에 나오는 그대로의 문장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왔던 전래본에는 ‘장단상교長短相較, 고하상경高下相傾’으로 되어 있습니다. 뜻은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운다’입니다. 곽점본과 백서본에는 왕필본의 ‘서로 비교하다’가 ‘서로 죽이다’로 되어 있고, ‘서로 기운다’가 ‘서로 사라지게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죽인다’로 번역한 글자는 ‘형刑’인데요, 우리는 주로 ‘형벌’이라는 용례로 사용합니다. 기원후 100년경에 편찬된 최초의 한자 사전인 《설문해자》에서는 ‘형刑’을 ‘경야剄也’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剄’은 ‘목 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형刑’을 ‘죽이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사라지다’로 번역한 ‘영浧’을 사전에서는 ‘가라앉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라앉는 것은 천천히 사라지므로 ‘사라지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문장에 나오는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죠. 그런데 앞 문장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생성한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정반대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죽인다,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이고 사라지게 한다를 우리에게 친숙한 한자로 표현하면 소멸消滅입니다. ‘소消’는 ‘사라지다’, ‘줄어들다’라는 뜻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멸滅’은 ‘멸망하다’, ‘없어지다’라는 뜻으로 완전히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생성과 소멸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노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생성했다가 서로를 소멸한다고 말한 것일까요? 노자가 예로 든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10cm 길이의 자와 30cm 길이의 자가 있습니다. 어느 자가 기나요? 네. 당연히 30cm 자가 길고 반대로 10cm 자는 짧습니다. 긺과 짧음이 동시에 생성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30cm 자의 긺과 10cm 자의 짧음이 소멸됩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소멸되지 않으면 고정되죠. 즉 30cm 자는 길다고 고정되고, 10cm 자는 짧다고 고정됩니다. 그런데 30cm 자 옆에 1m 길이의 자를 갖다 대봅시다. 그럼 어느 쪽이 더 기나요? 당연히 1m 길이의 자가 길고 30cm 자는 짧습니다. 아까는 30cm 자가 길었는데 이번에는 짧습니다. 30cm자의 길고 짧음은 비교되는 상대방에 의해 생성되는 것으로, 비교되는 순간에 생성되었다가 소멸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 속에는 30cm자의 길고 짧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기억 때문에 30cm자의 긺과 짧음이 소멸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즉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긺과 짧음입니다. 과거의 긺과 짧음은 ‘길었다’와 ‘짧았다’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현재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란 뭘까요? 현재는 오늘인가요? 오늘을 포함해서 가까운 사나흘을 현재라고 할 수 있나요?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눕니다. 과거過去는 ‘지나다 과過’자와 ‘가다 거去’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지나 가버린 것이 과거입니다. 미래未來는 ‘아니다 미未’자와 ‘오다 래來’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지 않은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그럼 현재는 뭐죠? 현재現在는 ‘나타나다 현現’과 ‘있다 재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글자 뜻으로 하자면 나타나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지금 감각하고 있는 것,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존재가 현재죠. 그런데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는 지나가 버립니다. 좀 헷갈리시면 현재를 지금으로 바꿔봅시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지금은 지나가 버립니다. 지나가서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좀 전에 내가 지금이라고 말한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나요? 없습니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죠. 그런데 이 과거는 어디서 왔나요? 미래에서 왔죠. 아직 오지 않은 것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과거와 미래는 그 뜻이 정반대입니다. 뜻뿐 아니라 실제로도 정반대이죠. 《도덕경》 2장에 등장하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죠. 그리고 과거와 미래 가운데에 현재가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생성하는 것이 현재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생성되는 순간 동시에 소멸됩니다. 현재는 소멸되어 과거가 됩니다. 현재가 소멸되지 않으면 현재에 멈춰 있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음...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한번 혼자서 조용히 현재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자 조용히 앉아서 마음으로 ‘현재’라고 외쳐보세요.
자, 이제 노자가 말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생성하고 소멸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은 하나이다라는 주장이 실제로도 그러한지 확인해 봅시다. 노자가 예로 들지 않는, 우리에게 친근한 사례를 가지고 노자의 주장이 진리인지 살펴봅시다.
스포츠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명언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일 겁니다. 얼마나 유명했냐면 이 말을 가지고 레니 크래비츠가 같은 제목으로 노래를 발표합니다. 들어보시면 소싯적에 팝송 좀 들어보신 분들에게는 익숙한 노래일 겁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는 요기 베라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요기 베라는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뉴욕 양키스의 포수였고 선수 은퇴 후 뉴욕 양키스 감독, 뉴욕 메츠 감독 등을 지냈습니다. 요기 베라가 1973년 뉴욕 메츠 감독을 할 때 내셔널리그 동부 디비전 1위팀 시카고 컵스와 9.5게임 차로 꼴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번 시즌은 가망이 없다”라고 하자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며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뉴욕 메츠는 베라의 말처럼 내셔널리그 동부 디비전 1위를 차지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 쉽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격파하고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습니다.
야구는 9회말 3아웃까지 잡아야 경기가 끝납니다.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라 하더라도 아직 경기가 끝난 것은 아니죠. 마지막 스트라이크가 들어가거나 타자가 공을 쳐서 아웃이 되면 경기가 끝납니다.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이긴 팀과 진 팀이 가려집니다. 만약 상대방 팀이 지지 않으면 내 팀이 이길 수 없으며, 내 팀이 지지 않으면 상대방 팀이 이길 수 없습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잡히면 이때 이김과 짐은 ‘동시에’ 생성됩니다. 마지막 아웃이 잡히고 이김과 짐이 동시에 생성되면서 이긴 팀과 진 팀이 결정됩니다. 이때 이김과 짐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이 상태에 대해 더 생각해 봅시다. 이김과 짐은 동시에 생성됩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지속되나요? 무슨 뜻이냐면 이김과 짐은 동시에 생성되면서 동시에 소멸됩니다. 분명히 경기에서 이긴 팀과 진 팀이 가려졌는데 무슨 소리하냐고요? 네. 그건 이제 이겼다와 졌다라는 과거시제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김과 짐은 동시에 생성되었다가 동시에 소멸됩니다. 만약 이김과 짐이 생성만 되고 소멸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김과 짐이 계속 고정되어 있겠죠. 이런 상황은 벌어질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경기에서 이김과 짐은 생성되는 순간 동시에 소멸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경기를 할 필요가 없죠.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움직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수요에 대해 어떤 재화나 용역을 일정한 가격으로 사려고 하는 욕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사전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급은 교환하거나 판매하기 위하여 시장에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수요는 사려고 하는 욕구이고 공급은 판매와 제공하는 일입니다. 수요는 사자buy, 공급은 팔자sell로,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소유한 아파트를 팔려고 중개업소에 매물로 내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내놓은 가격에 사려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매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매도자가 되려면 매수자가 있어야 합니다. 반대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내놓은 가격에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매매 계약을 해야 합니다. 이때 거래가 완료되는 시점은 계약서에 싸인하고 매수자는 아파트 열쇠와 비밀번호를 넘기고 매도자는 돈을 입금할 때입니다. 서로 열쇠와 돈을 주고받고 등기 이전까지 완료하면 매매가 완료됩니다. 그리고 이때 동시에 나는 매수자가 되고 상대방은 매도자가 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 여기서는 매수자와 매도자는 서로를 생성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매도와 매수, 매도자와 매수자가 소멸됩니다. 내가 매도자가 되는 순간 매도자로서의 역할이 소멸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계속 매도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럼 매매가 완료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매매가 완료되려면 매수와 매도, 매도자와 매수자가 소멸되어야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생성하고, 서로를 소멸하는 순간 그것들은 그것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매매란 매수자와 매도자가 부르는 가격이 서로 일치할 때, 서로 하나로 연결되면서 성사되는 것이죠.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를 생성하면서 동시에 서로 소멸합니다.
낳다와 이루다, 죽이다와 사라지다를 노자가 구별해 이야기한 이유는 시간의 문제 때문입니다. 낳다와 죽이다, 이루다와 사라지다 사이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낳다와 죽이다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따라서 둘 사이에는 시간이 없는 반면에, 이루다와 사라지다는 생성과 소멸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노자는 대립쌍 사이에서는 낳고, 이루고, 사라져가고, 죽이는 이 4개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죠.
2장에 나오는 반대되는 것들은 모두 정반대되는 것인데, 유일하게 선에 대해서만 노자는 선하지 않음을 얘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