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사를 보니, 5개월간 통신이 두절되었던 보이저 1호가 다시 응답 신호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57년 전에 발사된 인공위성이 그 먼 곳에서 아직도 신호를 보낸다니 참 대단한 기술력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집 TV는 10년도 안 돼서 고장 났는데 말입니다. 보이저 1호는 1977년에 발사돼 현재 지구로부터 약 240억 km 떨어진 성간우주를 시속 약 61,500km의 속도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시속으로 얘기하면 얼마나 빠른 건지 실감이 안 나니까 초속으로 바꿔 얘기하면 1초에 약 17km를 이동하고 있습니다. 총알 속도가 초속 약 300m니까, 말 그대로 총알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셈이죠.
보이저1호는 인류가 만든 것 중 가장 멀리 나아간 인공위성입니다. 보이저호 안에는 외계 생명체가 보이저호를 발견할 경우 인류 문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골든 레코드가 실려 있습니다. 이 레코드에는 115개의 이미지와 파도, 바람, 번개, 새, 고래, 다른 동물들이 내는 소리와 함께 55개 언어의 인사말도 녹음되어 있습니다. 한국어 “안녕하세요” 인사도 실려 있는데, 이 인사말들은 노래로 작곡되어 있어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을 선곡해 실었는데, 이중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2권 제1곡 전주곡과 푸가 C장조’가 있습니다. 이 곡은 흔히 평균율이라는 곡명으로 유명합니다. 한 음악학자는 “큰 재앙이 일어나 서양음악이 일시에 소멸된다 하더라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두 권만 남아 있다면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서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흐의 평균율은 모두 전주곡과 푸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주곡은 자유로운 형식으로 푸가 앞에서 곡을 시작하는 도입부 역할을 하는 곡입니다. 피아니스트 김준희는 전주곡은 질문, 푸가는 이에 대한 답변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푸가fuga는 ‘대위법(對位法, Counterpoint)’을 사용하여 작곡된 곡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대위법對位法의 한자 표기 그래도 설명하자면 대위對位는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서로 대립함’이라는 뜻입니다. 말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예를 들자면 푸가는 일종의 돌림노래입니다. 학교 다닐 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참여해서 <동네 한 바퀴>라는 노래를 돌림노래로 부른 적이 있을 겁니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우리 보고 나팔꽃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면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이때 몇 명의 학생이 노래를 ‘다 같이 돌자’부터 부르고 다음 몇 명의 학생들은 처음부터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동네’에 들어갈 때 ‘다 같이 돌자’를 시작합니다. 푸가는 이것보다는 훨씬 복잡하지만, 그 기본은 돌림노래와 같습니다.
지금까지 푸가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노자가 2장에서 말한 6법칙 중 다음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음音과 성聲은 서로 조화한다. 음성지상화야音聲之相和也.
앞에서 음音은 끊어지는 소리, 성聲은 이어지는 소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음과 성은 글자 그대로 끊어지는 소리와 이어지는 소리뿐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대립하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마치 대위법으로 만든 푸가처럼 말입니다. 많은 음악가들은 바흐의 푸가에 대해 대위법으로 완벽한 조화를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푸가는 서로 대립하는 소리로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낸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서로 같아야 조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흐의 푸가가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같은 음계의 음표로는 조화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같은 음표는 계속 같은 소리만 반복될 뿐입니다. 같은 소리만 반복되면 그것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음악, 그것도 조화로운 음악이 생성되려면 서로 반대되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노자가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를 말한 뜻입니다.
‘주역과 동양철학’ 강의할 때 서로 반대될 때 진정한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얘기했더니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자기는 잘 모르겠고, 서로 뜻이 맞는 친구나 만나서 같이 조화하면서 살겠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 분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서로 뜻이 같은 친구, 사람을 만날 때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서로 뜻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랜 친구가 진정 모든 면에서 나랑 뜻이 같을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친구하고는 절대 동업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업을 생각할 정도면 서로 죽이 잘 맞는 건데, 왜 친구와는 동업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까요? 싸움나니까요, 친구하고 동업했다가 사업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타인과 모든 면에서 뜻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아주 일부분만 맞는 건데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문장에 나오는 화和자를 많은 사람들이 ‘벼 화禾’자와 ‘입 구口’가 결합한 모습으로 해석해서 ‘같이 밥먹으니까 조화한다’, ‘같이 먹고 사는 공동체니까 조화한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화和자는 갑골문에서는 의 모양인데 이는 ‘피리’를 뜻하는 ‘약龠’자와 ‘벼 화禾’가 결합한 모양입니다. 현대 한자에도 ‘조화할 화龢’자가 있습니다. 화龢자에서 ‘화禾’는 음 역할만 하고, 뜻은 피리를 뜻하는 ‘약龠’자에 있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피리를 입으로 부니까 ‘약龠’이 ‘구口’자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원래 화龢는 피리로 서로 다른 음을 연주해 조화로운 음악을 만듦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조화라는 뜻이 나온 것이죠. 이것이 진짜 화和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설문해자》에서는 ‘화和’를 ‘서로 응譍하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조화한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 응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다음 구절을 봅시다.
앞과 뒤는 서로 떨어진다. 선후지상타야先後之相堕也.
이 문장은 왕필본에는 아래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전후상수前後相隨.
‘전후지상타’는 곽점본의 문장입니다. 곽점본 ‘타堕’로 되어 있는데, 왕필본에는 ‘수隨’로 바뀌어 있습니다.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해 보이죠? 네. 아마도 왜 ‘타堕’인지 이해가 안 가니까 비슷한 모양의 ‘수隨’로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설문해자》에서는 ‘타堕’의 뜻을 ‘고기를 찢다’로 설명하고 있다. 곽점본의 ‘타堕’가 백서본에서는 ‘타隋’로 되어 있습니다. ‘타隋’는 ‘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찢다’와 ‘떨어지다’는 모두 ‘분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리라는 용어를 가지고 전후지상타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앞과 뒤는 서로 분리된다. 선후지상타야先後之相堕也.
앞과 뒤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분리된다, 무슨 뜻일까요? 2장에서 서로 반대되는 것이 서로를 생성하고 소멸한다에 대해 설명할 때 생성과 소멸이 ‘동시同時에’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이 같은 시간에 출현하면 두 사건 간에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성하는 동시에 소멸한다면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만물이 생성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따라서 생성하는 동시에 소멸하지 않으려면 서로 반대되는 것이 ‘동시에’ 생성되면 안 됩니다. 동시에 생성되지 않으려면 먼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들이 서로 분리되기 때문에 만물이, 이 세계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로 반대되는 쌍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있다고, 하나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생성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인 쌍들은 그 하나됨으로 인해 번갈아 생성됩니다.
노자 6법칙에 나오는 있음-없음, 어려움-쉬움, 긺-짧음, 높음-낮음, 음音-성聲, 앞-뒤는 동시에 서로 생성하고 소멸된다고 설명했지만, 이 쌍들은 번갈아 생성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쌍들이 번갈아 생성되면서 시간이 생성됩니다. 반대로 이 쌍들이 동시에 생성될 때는 시간은 생성되지 않지만 공간에서 분리된 사물이 존재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긺과 짧음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30cm 자와 10cm 자의 길이를 비교하면 30cm 자는 길고 10cm 자는 짧습니다. 이때 길고 짧음은 동시에 생성됩니다. 길고 짧음이 동시에 생성되기 위해서는 별개의 30cm 자와 10cm 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30cm 자와 50cm 자를 비교해봅시다. 30cm 자는 짧지만 와 50cm 자는 깁니다. 30cm 자가 아까는 길었지만 이번에는 짧습니다. 이때 긺과 짧음은 번갈아 가며 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긺과 짧음이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앞과 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하철에서 줄을 설 때 내 앞에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의 뒤가 됩니다. 이때의 앞과 뒤는 동시에 생성되죠. 그런데 내 뒤에 다른 사람이 와서 줄을 서면 나는 그 사람 앞에 있게 됩니다. 아까는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앞에 있습니다. 이처럼 앞과 뒤가 번갈아 출현할 수 있는 이유는 앞과 뒤가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앞과 뒤가 출현하는 시간은 다릅니다. 즉 시간이 생성되는 거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사랑과 미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동시에 하나의 대상을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한다면 그건 내가 미친 겁니다. 내가 미치지 않고 살아가려면 내 마음속에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사랑과 미움은 번갈아 등장해야 합니다. 번갈아 등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사랑이 그와 반대되는 쌍인 미움으로 전환하는 것을 노자는 되돌아감이라고 합니다.
되돌아감은 도의 운동이고, 반야자返也者, 도동야道動也,
지나침은 도의 작용이다. 닉야자溺也者, 도지용야道之用也.
- 40장
만물은 사방으로 뻗어가며 자라나 만물방작萬物方作,
저절로 반드시 되돌아간다. 거이수복야居以須復也.
하늘의 도는 돌고 도니 천도원원天道員員,
각기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각복기근各復其根.
- 16장
진실로 굽히면 온전함으로 돌아온다. 성전귀지誠全歸之.
- 21장.
40장에는 반返, 16장에는 복復, 21장에는 귀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반返은 반反과 같은 글자입니다. 반反, 복復, 귀歸는 노자의 핵심 사상 중 하나로, 모두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되돌아가죠? 16장에 나오죠. 뿌리로 되돌아간다고. 그 뿌리가 뭐죠? 서로 반대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뿌리는 자신을 낳은 대립항입니다. 미움이 사랑을 낳으므로, 사랑이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미움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 다음에는 미움이 출현한다는 뜻이죠. 이것이 되돌아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바로 이 노자의 반복귀反復歸 사상에서 나왔습니다. 어디로 돌아갔냐면 죽음으로 돌아간 겁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삶을 살다가 죽으면 삶의 뿌리인 죽음으로 돌아갔다는 뜻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으니까, 사람들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갔다고 얘기하지만 인간이 땅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죠. 삶은 죽음에서 나왔으므로 삶이 끝나면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므로, 노자는 도동道動, 즉 도의 운동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도의 운동법칙이죠. 되돌아감은.
그다음 문장 “지나침은 도의 작용이다(닉야자溺也者, 도지용야道之用也)”에서 ‘닉溺’자는 곽점본을 따랐습니다. ‘닉溺’자가 백서갑본과 왕필본에는 ‘약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왕필본을 따라서 ‘약弱’으로 보고 이 문장을 “부드러움은 도의 쓸모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연구자들은 노자 사상이 부드러움과 약함을 중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노자 사상의 핵심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입니다. 부드러움(유柔)는 단단함(강剛)과 하나의 반대되는 쌍이고, 약함(약弱)은 강强과 반대되는 쌍인데, 노자가 한쪽만을 중시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닉溺을 약弱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강희자전을 보면 ‘닉溺’에 대해 《석명釋名》을 인용하여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닉이다(사우수왈닉死于水曰溺)’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자 사전을 보면 ‘닉溺’은 ‘물에 빠지다’라는 뜻도 있고 ‘지나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탐닉耽溺이라는 단어에서 닉은 지나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몹시 즐겨서 빠짐’이라는 뜻입니다. 몹시 즐겨서 빠지다보며 지나치게 됩니다. 그래서 ‘닉溺’에 지나침이라는 뜻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곽점본을 따라 ‘닉溺’으로 보고 ‘지나침’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대립항이 다른 대립항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작용이 지나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행복을 지나치게 추구할때 행복의 대립항인 불행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행복이 극에 달해야만 불행으로의 되돌아감이 발생합니다. 지나치게 사랑하다보면 그 사랑이 미움으로 전환하는 것도 이 법칙 때문입니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하다보니 그 사랑이 미움으로 전환하여 웬수가 되는 거죠. 그러므로 닉은 지나침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이상으로 노자가 말한 여섯 법칙에 대해 모두 설명했습니다. 이 법칙을 이해했다면 이제 1장을 이해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도대체 왜 노자가 도는 항상 도가 아니라고 말했는지 이해하러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