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웨인 다이어라는 미국 사람이 쓴 《도덕경》 해설서를 읽고 있습니다. 웨인 다이어에 따르면 《도덕경》은 《성경》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이라고 하더군요. 《도덕경》의 라틴어 판본이 나온 것이 1788년입니다. 그때 이후로 서양에서 영어, 독일, 프랑스어 등의 언어로 250여 종의 노자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웨인 다이어는 도道에 대해 ‘궁극의 실재’,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보통 도를 ‘원리’, ‘본질’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모든 것의 근원’과 같은 뜻이죠.노자는 이 세계의 원리, 도가 무엇인지 8글자로 설명합니다. 1장을 읽어봅시다.
도道가 도 되면 항상 도가 아니다.
이름이 이름 되면 항상 이름이 아니다.
없음을 만물의 처음이라 이름 짓고
있음을 만물의 어미라 이름 짓는다.
그러므로 항상 욕망이 없으면 그 묘한 본질을 보고,
항상 욕망이 있으면 그 현상만을 본다.
쌍을 이루는 둘은 같이 출현하여 이름이 달라지나 같다고 일컫는다.
가믈고 또 가믈하니,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도가도야道可道也, 비항도야非恒道也.
명가명야名可名也, 비항명야非恒名也.
무명만물지시야無名萬物之始也,
유명만물지모야有名萬物之母也.
고항무욕야故恒無欲也, 이관기묘以觀其眇,
항유욕야恒有欲也, 이관기소교以觀其所噭.
양자동출兩者同出, 이명동위異名同胃.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眇之門.
- 1장
‘도가도야 비항도야’ 이 여덟 글자에 대한 제 번역은 지금까지 나온 번역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지금까지 나온 번역을 보시죠.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고
-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49쪽.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常道]가 아니며
- 진고응 지음, 최재목․박종연 옮김,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진고응은 중국 학자로, 노장 철학 연구자들로부터 인정받는 세계적인 노장 철학자입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고
- 이석명 지음, 《노자》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 김홍경 지음, 《노자》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 최진석 지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 김용옥 지음, 《노자가 옳았다》
영문판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한번 볼까요.
The Tao that can be trodden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Tao.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name. - 제임스 레그James Legge, 《The Tao Teh King》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다 똑같은 번역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번역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입니다. ‘말하다’를 강조한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번역에는 이 ‘말하다’라는 행위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의 주체는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라는 이 세계의 원리가 결국 인간의 행위와 관련있다는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니까, 도를 언어로 말할 수 없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언어로 말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 몸으로 해야죠. 말로 못 하면 몸으로 해야죠.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는 것, 사랑을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념화된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대부분은 “사랑해”라고 말로 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붉히는, 언어 이전의 표정의 전달력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더 내면의 실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 김용옥 지음, 《노자가 옳았다》
‘도가도야 비항도야’를 ‘언어로는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해석하면 결국 김용옥처럼 시링이라는 감정을 말로 하는 것보다 몸으로 해야 사랑이라는 감정의 진실됨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김용옥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요? 언어가 언어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없는데, 뭐하러 언어를 씁니까? 다 몸으로, 행동으로 하지. 김용옥의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로써 감정을 전달하고, 때로는 몸으로 전달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노자 연구자들이 ‘말하다’로 번역한 글자는 ‘도道’입니다. 도가도道可道에 나오는 도道 중 두 번째 도道를 ‘말하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도(道)」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도(道)로, 즉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도리(道理)」이다. 두 번째 「도」자는 말하다는 뜻이다. - 진고응 지음, 최재목․박종연 옮김,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두 번째 도를 말하다로 해석한 진고응은 ‘도가도야’를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도’로 해석합니다. 진고응뿐 아니라 김홍경, 최진석도 두 번째 도를 말하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탐탁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도라는 글자인데, 하나는 도라는 명사이고, 하나는 말하다는 동사라는 해석이 뭔가 석연치 않아 보입니다. 같은 문장 안에서 다른 뜻으로 쓰였다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연구자들이 두 번째 도를 말하다로 해석하는 이유는 2장에 나오는 ‘불언지교不言之敎’때문입니다. 불언지교는 ‘말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말할 수 없다는 불언과 도가도야, 비항도야를 연계해서 ‘옳거니, 도道도 말로 할 수 없다고 해석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궁극에는 김용옥처럼 말할 수 없으니 몸으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과 다르게 해석합니다. 저는 ‘도가도야, 비항도야’에 나오는 도道를 전부 ‘원리’로 해석합니다. 전부 ‘도’로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 가장 중요한 글자는 ‘가可’입니다. 《설문해자》에서는 ‘가可’자를 ‘긍�이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긍�’은 ‘긍肯’과 같은 글자입니다. ‘긍肯’은 ‘긍정하다’, ‘수긍하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한문에서 ‘가可’라고 쓰면 '옳다', ‘그렇게 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도가도道可道’는 ‘도가 도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비항도非恒道’는 글자 그대로 ‘항상 도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 속에서 쓴 책 《논리철학논고》 서문에서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 그 문제들이 우리의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 데서 생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철학의 문제란 없으며 지금까지 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해온 것들은 실상 언어의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를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도는 결국 언어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도가도 비상도’를 ‘도가 도 되면 항상 도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면 언어의 문제와 무관한 이 세계의 생성 및 운동 원리를 말한 문장이 됩니다.
‘도가 도 되면 항상 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어떻게 나왔는지 앞에서 설명한 원리와 법칙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사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물은 서로 반대되는 대립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엇의 대립항은 무엇 아님이며, 무엇 아님에는 무엇의 반대되는 것이 포함됩니다. 대립항의 성질은 반대되는 대립항의 성질이 결정될 때 동시에 결정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아래 정육면체를 봅시다.
우리 눈에 정면에 보이는 면을 앞이라고 이름 짓는 순간 동시에 반대면은 뒤가 됩니다. 반대로 우리 눈에 정면에 보이는 면을 뒤라고 이름 짓는 순간 동시에 반대면은 앞이 됩니다. 앞이었던 면이 뒤가 되고, 뒤였던 면이 앞이 됩니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대립항의 성질, 위치, 기능 등에 의해 다른 대립항의 성질, 위치, 기능 등도 결정됩니다. 이것을 도라는 단어로 설명하면, 도가 도 되면 도의 대립항인 ‘도 아님’이 동시에 생성됩니다. 반대로 ‘도 아님’이 ‘도 아님’이 되면 도가 생성됩니다. 그러니까 노자는 대립항 중 하나의 성질이 결정되면 그와 반대되는 대립항의 성질도 결정되는 현상을 ‘도가도 비항도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명료하게 이해가 되시죠?
그다음 문장 ‘명가명야名可名也, 비항명야非恒名也’를 봅시다. 학자들이 ‘가可’를 ‘말하다’로 번역한 이유는 바로 이 문장도 한몫 했습니다. ‘명名’은 ‘이름’이란 뜻이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번역은 ‘도가도야 비항도야’에 대한 번역과 비슷합니다.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49쪽.
말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常名]이 아니다.
- 진고응 지음, 최재목․박종연 옮김,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무엇’으로 불릴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 이석명 지음, 《노자》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 김홍경 지음, 《노자》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 최진석 지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 김용옥 지음, 《노자가 옳았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로 저는 ‘이름이 이름 되면 항상 이름이 아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름을 짓는 행위를 인간 고유의 행위로 여겼는데, 인간 만이 사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짓겠습니까? 낚시를 가면 미끼를 바늘에 달아서 물고기를 낚습니다. 붕어 낚시면 떡밥이나 지렁이 같은 미끼를 달죠. 이런 미끼 말고 다른 미끼를 달면 붕어가 물지 않습니다. 붕어도 미끼의 냄새와 모양을 인식해 ‘아, 저건 먹이다’, ‘저건 먹이가 아니다’라는 분류를 하는 거죠. 붕어도 사물에 ‘먹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봐야죠. 나아가 돌고래는 소리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돌고래도 사물의 이름을 짓고 식별하는 행위를 한다는 거죠. 따라서 여기서 이름은 이러한 인식 주체의 인식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 인식 행위는 이름을 지어 사물을 분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붕어가 먹이를 먹이로 인식하고 ‘먹이’라고 이름 짓는 순간, 뭐가 생성되죠? 도가 도 되면 뭐가 생성되죠? 도 아님이잖아요. 그럼 먹이를 먹이라고 이름짓는 순간 ‘먹이 아님’이 생성됩니다. 지렁이가 먹이가 되면 지렁이 아닌 것은 다 ‘먹이 아님’이 되는 거죠.
뉴스 보니까, 우리나라 토종 어류인 가물치가 미국으로 넘어가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킨다고 하더군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저수지 낚시를 많이 다녔는데, 저수지에는 붕어, 잉어, 가물치가 많이 삽니다. 저수지에 도착하면 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가물치 낚시에 쓸 조그만 개구리를 잡는 거였습니다. 개구리 엉덩이에 낚시를 달아서 던져 놓으면 살아 있는 청개구리가 움직이면서 미끼 역할을 합니다. 가물치에게는 청개구리가 먹이인 거죠. 붕어 낚시하는데 청개구리를 미끼로 쓰면 붕어가 절대 안 뭅니다. 그렇다면 청개구리는 붕어한테 ‘먹이 아님’이 되는 거죠. 먹이를 먹이라고 인식하면 동시에 먹이 아닌 것이 생깁니다. 이름이 이름 되면 동시에 항상 ‘이름 아님’이 생성됩니다. 반대로 ‘이름 아님’이 ‘이름 아님’이 되면 동시에 항상 ‘이름’이 생성됩니다. 이처럼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인식하고, 이름을 짓는 행위도 노자가 말하는 도道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동시에 그 말속에는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의미가 생겨납니다. ‘사랑하지 않아’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해’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표정이나 몸짓을 사용해서 사랑해를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손가락 하트를 이용해서 애정을 표시합니다. 손가락 하트라는 특정 동작을 함으로써 ‘애정’이라는 감정을 전달합니다. 이는 손가락 하트를 제외한 나머지 동작은 ‘애정’이라는 감정을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손가락 하트를 제외한 나머지 동작은 ‘손가락 하트 아님’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도道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노자는 왜 도가 도 되면 항상 도가 아니라고 했을까요? 다시 정육면체를 봅시다.
앞이 앞 되면 뒤가 뒤 됩니다. 이번에는 좀 전에 뒤가 되었던 면을 앞이라고 하면 좀 전에 앞이었던 면이 뒤가 됩니다. 정육면체는 여섯 개의 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뒤, 좌우, 상하죠. 앞이 앞 되면 나머지 면은 위치에 따라 뒤좌우상하가 되죠. 이때 뒤좌우상하는 뭉뚱그려 ‘앞 아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와 ‘도 아님’은 항상 동시에 생성되며, 대립항의 성질이 결정되면 그 성질이 결정됩니다. 앞 장에서 설명했지만, ‘도 아님’과 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대되는 대립항은 서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가 한쪽이 무엇이 되면 다른 한쪽은 무엇 아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물은 무엇인가요? 무엇 아님인가요? 무엇이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 아님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이면서 무엇 아님이 되겠죠. 이러한 본질을 노자는 ‘도가 도 되면 항상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겁니다.
《도덕경》 곳곳에는 이 원리를 설명하는 문장들이 아주 많습니다.
네와 아니요,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아름다움과 추함, 서로 다른 것이 무엇인가?
유여아唯與呵, 상거기하相去幾何?
미여아美與亞, 상거하약相去何若?
- 20장
‘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속에는 ‘네 아님’이 포함되어 있고, ‘네 아님’에는 ‘아니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네’라고 말하는 순간 ‘아니요’가 생성됩니다. ‘네’와 ‘아니요’는 하나로, 서로 상대방으로 포함하고 있으므로 거리는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추함일 수도 있다.
천하개지미지天下皆知美之
위미야爲美也,
아이亞已.
- 2장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하는 순간 다른 대상은 아름답지 않음이 되며, 아름답지 않음 속에는 추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를 포함하고 있으며 아름답다고 규정되는 순간 반대면은 추함이 되며, 추함이라고 규정되는 순간 반대면은 아름다움이 됩니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추함은 상대적인 관계, 즉 상대에 의해 결정되는 관계이므로 아름다움은 추함이 될 수도 있고 추함은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正을 말함은 반反을 (말함과) 같다(정언약반正言若反) - 78장
이 문장을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바른 말은 반대로 들린다’, ‘옳은 말은 반대로 들린다’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정언약반 어디에 ‘들리다’를 뜻하는 글자가 있나요? ‘들을 문聞’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정正’을 설문해자에서는 ‘시是’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시是’는 ‘이것’, ‘옳다’는 뜻입니다. 정언약반正言若反은 ‘이것을 말하면 저것을 말함과 같다’, ‘옳음을 말하면 그 반대인 그름을 말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 되죠. 어떤 하나의 사건을 놓고 두 사람이 옳다 그르다 싸우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A라는 사람이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는 순간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은 그름이 됩니다. A가 옳을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그르기 때문입니다. 즉 A의 옳음은 상대방의 그름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때 옳음은 옳음 아님을 포함하고 있고, 옳음 아님에는 그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옳음 안에는 그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옳음을 말하는 것은 그름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노자의 도에 부합하는 정언약반의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정은 왜 반과 같을까요? 같음을 의미하는 동同은 1장에도 나옵니다.
쌍을 이루는 둘은 같이 출현하여 이름이 달라졌으나 같다고 일컫는다.
양자동출兩者同出, 이명동위異名同胃.
- 1장
‘양兩’을 한자사전에서는 ‘둘’, ‘짝’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대개 ‘양兩’을 ‘둘’로만 번역하는데, 이 문장에서 ‘양兩’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둘을 가리키므로 ‘쌍을 이루는 둘’이라 번역하였습니다.
쌍을 이루는 둘은 ‘도’와 ‘도 아님’, ‘이름과 이름 아님’, ‘선과 선 아님’, ‘아름다움과 추함’, ‘있음과 없음’ 등입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으며 한쪽이 출현하면 반대쪽도 항상 동시에 출현합니다. 한쪽이 도가 되면 반대쪽은 도 아님이 되고, 한쪽이 선이 되면 반대쪽은 선 아님이 되고, 한쪽이 아름다우면 한쪽은 추함이 되는 것처럼 대립항에 의해 서로 이름이 달라집니다.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 성질, 기능, 위치 등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자는 ‘이름이 달라졌으나 같다고 일컫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름이 달라진 건 하나로 연결된 서로 반대되는 쌍을 의미하죠. 그 쌍이 같다고 노자는 말하였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요? 왜 같다고 했을까요? 저는 노자가 말한 같음을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설명한 도道의 원리와 법칙을 가지고 제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같음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정육면체를 봅시다.
한쪽이 앞이 되면 반대면은 뒤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면들은 그 위치에 따라 상하좌우가 됩니다. 이번에는 좀 전에 오른쪽이었던 면을 앞이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반대면은 뒤가 됩니다. 처음의 앞뒤면과 나중의 앞뒤면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름이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 면들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질이 결정되지 않은 그래서 서로 같지만 반대되는 위치에 자리하면서 하나로 연결된 쌍이 있고, 이 쌍의 한쪽 대립항의 성질이 결정되면 다른 쪽의 성질도 결정된다는 거죠. 이 설명이 노자가 말한 ‘이름이 달라졌으나 같다고 일컫는다’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노자가 말한 같음은 쌍을 구성하는 대립항의 성질이 결정되기 전, 이름이 결정되기 전이 같다는 거죠. 서로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다가 한쪽이 도가 되면 반대쪽은 도 아님이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노자의 말한 도의 진정한 의미, 이 세계를 생성․운행하는 궁극의 실재라는 것이죠.
아마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고, 그런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노자는 이를 ‘가믈고 또 가믈다’고 하였습니다. 가믈함은 보일 듯 말듯 하다는 것입니다.
가믈고 또 가믈하니,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다.
현지우현玄之又玄, 중묘지문衆眇之門.
《설문해자》에서는 ‘현玄’자를 ‘깊고 멀다. 검으면서 붉은 색이 있는 것을 현玄이라 한다’로 설명하였습니다. 깊고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검은 색에 섞여 있는 붉은 색도 잘 보이지 않죠. 그만큼 세계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어렵습니다.
노자는 어려운 이유로 인간의 욕망을 꼽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욕망이 없으면 그 묘한 본질을 보고,
항상 욕망이 있으면 그 현상됨만을 본다.
고항무욕야故恒無欲也, 이관기묘以觀其眇,
항유욕야恒有欲也, 이관기소교以觀其所噭.
욕망 때문에 도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을 본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