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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May 25. 2024

도6. 세계는 스스로 생성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중국 같은 고대 문명을 지닌 나라에서 어째서 예수 같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만 없지 않죠. 우리나라도 예수 같은 유일신, 초월적 존재를 믿는 종교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도 이 세상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존재의 이름은 ‘상제上帝’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상제가 이 세상을 주재한다고 생각해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상제에게 그 일을 해야 할지 말지 물어보았습니다. 상제라는 초월적 존재에게 물어보는 행위가 요즘 우리가 점占이라고 부르는 행위의 기원입니다. ‘점占’자는 ‘복卜’과 ‘구口’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풀이하면 점占은 ‘복卜에 묻다’라는 뜻입니다. 복卜은 거북 배딱지와 짐승뼈를 뜨거운 불로 지진 뒤 갈라진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卜자가 상제가 내려주는 질문에 대한 답변, 미래에 대한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을 행하기 전에 항상 상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복을 마친 뒤 복을 행하는 데 사용한 거북 배딱지에 새겨 두었습니다. 이 문자들이 우리가 갑골문이라고 부르는 문자입니다.      


물어봅니다. 8월에 상제께서 많은 비를 내리지 않겠습니까? 정유일에 비가 내렸는데 갑인일까지 계속되었고, 18일 동안 내렸다. 9월이었다.  - 《갑골문 합집》 10,976편 앞면     


이 복은 상제에게 비가 많이 내릴지 말지를 물어본 겁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제의 답변은 卜과 같은 형태의 갈라짐으로 나타나고 이에 대한 해석은 질문 다음에 적어 놓거나, 실제로 이 해석이 들어맞았는지에 대한 여부도 적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계해일에 복을 칩니다. ‘각’이 물어봅니다. 오는 갑자일에 비가 내리지 않겠습니까? 갑자일에 비가 적게 내렸다. - 《갑골문 합집》 12,973편      


물어봅니다. ‘둔’에게 수갑을 채울가요? 왕께서 점을 해석해 말했다. ‘채우라’. - 합집 697편 뒷면   

  

계축일에 점을 칩니다. ‘각’이 물어봅니다. 5백 명의 ‘복’을 쓸까요? 10일이 지난 임신일에 또 백 명을 썼다. 3월이었다. - 《갑골문 합집》 559․562편     


경진날 복을 칩니다. 왕이 물어 봅니다. 짐이 강족에게 궁형을 시행했는데 죽지 않겠습니까? - 《갑골문 합집》 525편.     


‘상’강에서 고기를 그물로 잡을까요? - 《갑골문 합집》 28,436편     


울창주 한 주전자를 올릴까요? - 《갑골문 합집》15,795편     


돼지를 쓸까요?

흰 돼지를 쓸까요?

노란 돼지를 쓸까요? - 《갑골문 합집》 29,546편     


오늘 신미일 왕께서 밤에 외출을 나갈까요? 

오늘 ‘미’일 밤에 나가지 말까요? - 《갑골문 합집》 7,772편 앞면     


갑골문으로 기록된 질문을 보면 드러나지만 별의별 일을 다 상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 갑골복은 은나라(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046년) 때 성행했으며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초기까지도 왕실에서 행하였습니다. 그 이후 점차 사라졌는데, 그 뒤를 오늘날 우리가 주역이라고 부르는 점술이 이었습니다. 갑골복 대신 주역점을 치기 시작한 거죠. 주역점은 갑골복과는 달리 상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상제라는 초월적 존재는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주역점도 주나라 중반 무렵부터 지배층 사이에서는 사라졌습니다. 

상제라는 초월적 존재, 갑골복과 주역점이 사라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 맞으니까요. 상제의 답변이 자꾸 엉터리라는 게 드러나니까, 상제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든 거죠. 나아가 점복이 사라진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갑골복에서부터 주역점까지 관통하는,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 세계의 운행 원리, 운동 원리가 있습니다. 

갑골복은 卜자 형태로 나타난 갈라짐을 보고 상제의 답변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행위입니다. 이때 卜자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卜자 모양으로 갈라지도록 거북 배딱지의 반대편에 흠을 내었습니다.   


거북 배딱지에 가로와 세로로 균열을 낸 모양을 그린 그림
위 그림처럼 균열을 낸 뒤 반대면을 불로 지지면 복卜자 모양의 균열이 생긴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卜자 모양이 나오도록 미리 卜 모양으로 균열을 팠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거북 배딱지 왼쪽에는 ‘ㅏ’모양의 균열이 생겼고, 오른쪽은 ‘ㅓ’모양의 균열이 생겼습니다. 왜 卜모양에 집착했을까요? 왜 굳이 卜모양이 질문에 대한 상제의 답변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왜 굳이 힘들게 거북 배딱지에다 卜자 모양이 잘 나오도록 미리 흠을 냈을까요? 미리 흠을 내지 않고 그냥 불로 지지면 훨씬 다양한 형태의 균열이 생겼을 텐데 말입니다. 왜일까요? 이 점에 대해 궁리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卜의 모양이 가로와 세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로와 세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 세계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卜모양에 집착한 거죠. 그리고 위 거북 그림에서 드러나듯이 가운데를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마주 보도록 팠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 수고롭게 서로 마주 보도록 팠을까요? 마주 본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은 갑골복을 행할 때 철저하게 이 세계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반영해서 행했습니다. 

이 생각은 질문을 하는 방식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아래 갑골 복사는 실제로 은나라 때 행해진 점복으로 《병》 1편이라는 갑골에 새겨져 있습니다.     


부를 정벌할까요?      

부를 정벌하지 말까요? 

- 《병》 1편     


‘부’라는 이민족을 정벌할지 말지를 서로 정반대되는 점문을 가지고 갑골복을 쳤습니다. 이를 정반대정正反對貞이라고 부릅니다. ‘정반대정正反對貞’의 ‘정貞’은 ‘복에 묻는다’라는 뜻으로, 하나의 사안에 대해 한 번은 긍정으로 한 번은 부정으로 물었다고 해서 정반대정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점을 칠 때도 서로 정반대되는 점문을 가지고 점을 쳤다는 사실에서 이 세계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갑골복의 이러한 원리는 주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주역하면 많은 사람들이 음양을 떠올립니다. 음양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陰의 원래 뜻은 어둠, 양陽의 원래 뜻은 밝음입니다. 어둠과 밝음은 정반대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주역의 본문인 괘효사에 음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주역이 음양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주역 괘효사에는 음양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것’이라는 범주로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인 길흉은 주역 괘효사에 매우 자주 나오는 글자입니다. 또한 효이름에 붙어 있는 숫자 6과 9는 각각 짝수와 홀수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역의 기호인     (양효),     (음효)도 짝수와 홀수가 변해서 만들어진 기호입니다.      (양효)는 연결되어 있고     (음효)는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기만 해도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역에 짝수와 홀수가 등장하는 이유는 주역점법 때문입니다. 주역점을 치면 6, 7, 8, 9의 네 숫자 중 하나가 나옵니다. 6과 8은 짝수이고, 7과 9는 홀수입니다. 짝수는 음에 비정比定하고, 홀수는 양에 비정합니다. 그런데 왜 음과 양에 각각 숫자 두 개씩 비정한 걸까요? 아래 표를 봅시다.     


               

                                홀수(양)                                             짝수(음)

                                    7                    9                                      8                        6

                          변하지 않음      변함                      변하지 않음          변함

                                 무엇      무엇 아님                      무엇            무엇 아님


홀수 7과 짝수 8은 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짝수 6과 홀수 9는 변함을 의미합니다. 같은 홀수 또는 짝수라도 하나는 변하지 않음, 또 하나는 변함의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점을 쳐서 홀수라도 6이 나오냐 8이 나오냐, 짝수라도 7이냐 9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점을 쳐서 6, 즉 변하는 음이 나오면 음효를 양효로 바꾸고, 점을 쳐서 9, 변하는 양이 나오면 양효를 음효로 바꾸어서 해석합니다. 만약 7이나 8이 나오면 바꾸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의 음과 양은 변화와 변하지 않음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상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홀수와 짝수에 각각 두 개의 숫자를 비정한 것이죠. 이때 변화하지 않음은 변화가 아님입니다. 즉 변화는 ‘무엇’에 해당하고, 변화하지 않음은 ‘무엇 아님’에 해당합니다. 주역점은 하나의 사물이 무엇과 무엇 아님의 상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상을 점법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제가 쓴 책 《스스로 읽고 이해하는 주역 공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는 도 안에 반대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그래서 반대되는 것을 스스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의 처음은 도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그 최초의 도의 이름은 없음과 있음입니다.      


없음을 만물의 처음이라 이름 짓고     

있음을 만물의 어미라 이름 짓는다.     

무명만물지시야無名萬物之始也,

유명만물지모야有名萬物之母也.

- 1장     


만물의 처음과 만물의 어미는 둘 다 같은 뜻입니다. 노자는 둘이 같은데 나와서 이름이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있음과 없음은 2장에도 나오죠?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는다.   

유무상생有無相生.   

- 2장     


앞에서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있음과 없음은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를 낳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도의 원리로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쪽이 있음이 되는 순간 반대쪽은 없음이 되고, 한쪽이 없음이 되면 반대쪽은 있음이 됩니다. 

최초의 쌍인 있음과 없음에 의해 만물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상제, 즉 초월적 존재가 필요할까요?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서로가 서로를 낳을 수 있는데 신은 필요 없죠.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는 용솟음치니                        

아무리 써도 비워지지 않는다.            

연淵이로구나! 만물의 뿌리와 닮았도다.   

그 날카로움은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은 풀어 버리고,                  

그 빛과 조화하기 위해                   

그 먼지와 같아진다.                     

담湛이로구나! 있는 듯 없는 듯 하구나.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지만, 

상제象帝보다 앞서네.                     

도충道沖

이용지유불영야而用之有弗盈也.

연아淵呵, 시만물지종佁萬物之宗.

좌기예銼其兌,

해기분解其芬,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

담아湛呵, 시혹존佁或存.

오부지기수지자야吾不知其誰之子也,

상제지선象帝之先.

-  4장


도는 있음과 없음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없는 듯하다가도 용솟음칩니다. 쓰고 또 쓰고 막 써서 이제 다 썼는가 싶으면 또 생겨나니 비워지지 않습니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얽힌 것을 푼다는 것은 쌍을 이루는 한 대립항이 다른 대립항으로 뒤바뀜한다는 뜻입니다. 뒤바뀜은 시간의 작용으로 인해 반대되는 것들이 번갈아 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밝음은 조화하려면 그 반대되는 것인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상징인 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처럼 도가 만물을 생성하므로 도는 상제보다 앞섭니다. 도는 상제보다 먼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초월적 존재가 필요하나요? 없습니다. 상제는 필요 없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 세계가 도에 의해 스스로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상제와 같은 신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것이 바로 고대 중국에 예수 같은 신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 세계를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없다는 것은 이 세계가 스스로 생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는 스스로 생성함을 따른다.  도법자연道法自然. - 24장     


법法은 죄인을 심판한다는 의미를 지닌 글자였는데, 여기서 지켜야 함, 따라야 함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보통 도법자연에서 법을 ‘본받는다’로 해석하는데, 그보다는 따르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자연自然은 보통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으로 해석하여,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삼국시대 위나라 장읍이 편찬한 자전인 《광아廣雅》에서는 ‘연然’을 ‘이루다[성成]’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연然을 ‘이루다’로 해석하면 자연은 ‘스스로 이루다’의 뜻이 됩니다. 도가 스스로 생성함을 따른다는 것은 도에 의해 이 세계가 스스로 생성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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