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당쟁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인의 제갈공명’이라 불리던 송익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노비의 후손이라는 굴레 때문에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파주 심학산(현재 파주출판단지 뒤쪽에 우뚝 솟은 산)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송익필ㆍ송한필 형제가 있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당대에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는데 서인의 막빈(幕賓)이 되어 간사한 논의가 다 그들의 말에서 나왔다. -《괘일록》
1589년에 정여립 역모사건이 발생하여 동인 천여 명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동인 측에서는 이 사건을 조작한 주모자로 송익필을 꼽았다.
송익필은 사람들과 방죽을 다투다가 형관(사법관)에게 쫓기는 바가 되어 군색하기가 심해져 이 사건을 번복시
켜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당의통략》
방죽을 다투다라는 것은 ‘곽사원의 제방 송사’를 뜻하는 것으로 곽사원이라는 자가 방죽을 가지고 다투어 소송을 내었는데, 이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 사위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을 낳은 어머니가 노비였다는 이유로 인해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급기야 송익필 가문 전체가 노비로 환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환천으로 인해 송익필 가문은 뿔뿔히 흩어져 성과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게 되었다.
동인들의 탄압에 반격하기 위해 서인 측에서 기획하여 일으킨 사건이 정여립 역모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송익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송익필은 동서분당과 당쟁의 와중에서 간계와 협잡과 드잡이를 일으킨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문학에도 뛰어나 수천 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는데, 그가 남긴 시 중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언제나 짹짹거리며 우는 새들
어찌하여 항상 즐겁게 지저귀는가.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니
이래서 항상 부족한가 보다.
- 〈새소리 유감〉
남들에게는 만족을 모른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도 만족을 몰라 숱한 목숨을 묻었으니 누가 만족할 줄 몰랐는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송익필의 만족”이란 실제로는 권력과 이익을 붙좇는 인생이면서도 겉으로는 고결한 척 자처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