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봅시다. 이 세계는 서로 반대되면서 하나로 연결된 한 쌍에 의해 생성되었고 운행됩니다. 노자는 이것을 ‘도’와 ‘도 아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쌍은 한쪽이 도가 되면 다른 한쪽은 도 아님이 됩니다. 이 쌍은 서로를 낳고 서로를 소멸합니다. 생성되자마자 소멸되면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서로 반대이면서 하나인 이 쌍은 분리되어 번갈아 출현합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도道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도에 어긋나게, 도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도에 따라 살아야 할까요? 이 세계의 운동 원리와 어긋나게 살면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마 오래 못 갈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겠지요. 이 세계의 원리에 따라 사는 노자 처세법의 핵심이 바로 덕德입니다.
《백서 노자》에서는 제일 첫 번째 장이 덕으로 시작하는 장입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높은 덕은 덕을 내세우려 하지 않으니,
오히려 덕이 있네.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오히려 덕이 없네.
상덕부덕上德不德, 시이유덕是以有德.
하덕불실덕下德不失德, 시이무덕是以無德.
- 37장
이 구절은 《도덕경》 7장에 나오는 ‘그 몸을 뒤로 두는 데도 몸이 앞서게 되고, 그 몸을 외면하는데도 몸이 보존된다는 구절과 그 사상이 똑같습니다. 몸을 뒤로 둔다는 것은 남보다 앞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타인을 누르고 앞서 나가지 않고 오히려 경쟁에서 지는 것이 몸을 뒤로 두는 것이죠. 그런데도 오히려 남보다 앞서게 됩니다. 즉 남을 이기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이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덕이 있음을 앞세우지 않으니 덕이 있습니다. 반대로 덕을 잃지 않기 위해 덕이 있음을 내세우면 덕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서로 뒤바뀜 법칙 때문입니다. Ⅰ부 4장에서 설명했듯이 반대이면서 하나인 쌍은 서로 분리되어 번갈아 출현합니다. 이걸 한자로는 상호 전화라고 합니다. 전화轉化라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반대되는 것으로 바뀌는 겁니다. 먼저 앞선 것이 나중에 뒤서게 되고, 먼저 뒤선 것이 나중에 앞서게 되는 것이 전화입니다. 우리말로는 뒤바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게 현명한 걸까요? 나중에 뒤서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먼저 뒤서야 합니다. 먼저 뒤서게 되면 나중에 앞서게 됩니다. 덕도 덕 자체를 내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왜죠? 내세우면 잃게 되니까. 즉 덕은 ‘내세우지 말라’, ‘뒤에 서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반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보다 먼저 가려 하고, 남 앞에 서려 하고, 남보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덕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노자는 반대로 남 뒤에 가라고 하고, 남 뒤에 서라 하고, 남보다 나쁜 자리에 앉으라 하고, 덕을 내세워서 덕이 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노자는 도의 원리에 맞게 삶도 철저하게 반대로 살라고 말합니다. 이를 노자는 ‘현덕玄德’이라 말합니다.
도는 만물을 낳고, 멈추고,
오래 가게하고, 망하게 하고,
안정케 하고, 해롭게 하고,
기르고, 뒤엎는다.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되게 해 주면서도 기대지 않으며,
오래 가게 하지만 다스리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덕玄德이라고 한다.
도道, 생지生之, 축지畜之,
장지長之, 수지遂之,
정지亭之, 독지毒之,
양지養之, 복지覆之.
생이불유야生而弗有也,
위이불시야爲而不恃也,
장이부재야長而弗宰也,
시위현덕是胃玄德.
-51장
도道, 생지生之, 축지畜之의 번역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 문장은 백서본에 나오는 문장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모두 도道, 생지生之, 축지畜之를 ‘도는 낳고 기른다’로 번역했습니다. ‘축畜’은 ‘가축’, ‘저축하다’라는 용례로 주로 쓰이는 ‘쌓다’, ‘모으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그런데 이 ‘축畜’자에는 ‘지止’의 의미도 있습니다. 《강희자전》에 보면 축畜의 뜻에 대해 ‘지止’라고 적어 놓고, 이 근거로 《맹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장구 하>에 보면 “기시왈其詩曰 ‘축군하우畜君何尤’ 축군자畜君者, 호군자好君也”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우재호 번역본을 보면 “그 시에 말하기를 ‘군주의 욕심을 막은 것이 무슨 잘못이랴’라고 하였으니 군주의 욕심을 막은 것은 군주를 사랑한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맹자는 축畜을 ‘욕심을 막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지止’는 ‘그치다’, ‘멈추다’라는 뜻이므로 이에 근거하여 ‘축畜’을 ‘멈추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수遂’는 보통 ‘따르다’, ‘좇다’라는 뜻으로 번역하는데, 설문해자에서는 ‘망亾’으로 설명하였습니다. 亾는 ‘망할 망亡’과 같은 글자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도는 만물을 낳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낳고 오래 가게 하면서도 멈추고 망하게도 하고 안정하게 하면서도 흔들어서 뒤엎기도 합니다. 낳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 소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안정되었나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뒤엎어버리는데 안정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도뿐입니다. 그러니 낳고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유하지 말아야가 아니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낳은 내 자식이니까, 내가 이룬 업적이니까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착각에서 벗어나 소유하지 마세요. 그게 덕입니다. 이루게 해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어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 살게 해주면서도 다스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 우리의 욕망과는 반대입니다. 완전 정반대입니다. 노자는 이 세계가 서로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사는 삶도 욕망에 정반대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를 현덕玄德이라 한 겁니다. ‘현玄’자는 1장에서도 설명했지만 가믈가믈하다는 뜻입니다. 가믈가믈하니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인데 내 소유가 아니라니,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룬 업적인데 내 소유가 아니라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고 실천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도덕경 2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도 현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은 솟아나게 하되 시작하지 않으며,
이루되 뽐내지 않는다.
이뤄도 머무르지 않는다.
오로지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떠나지 않게 된다.
만물작이불시야萬物作而弗始也,
위이부지야爲而弗志也.
성이불거成而弗居,
부유불거야夫唯弗居也,
시이불거야是以弗去也.
- 2장
내가 낳은 것 옆에 떠나지 않고 머무르려면, 내가 쌓은 업적에 머무르고 싶다면 머무르지 않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순간, 지키려고 더욱 노력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은 커집니다. 왜 고통이 커지냐면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과를 이뤄도 머무르지 마세요. 그래야 진정으로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됩니다. 이처럼 반대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