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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 Feb 17. 2016

활용 한국사 9 - “인생은 양녕처럼”

양녕대군 이제는 1394년 태종 이방원의 아들로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로 있던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그의 기행과 악행은 유명했다. 궁궐을 도망쳐 나가 숨기도 했으며, 남의 첩이 이쁘다는 소문이 나면 도적질하여 궁안에 두기도 했으며, 기생을 궁궐로 몰래 들여와 섹스를 즐기고, 사냥과 놀이와 노래를 즐기는 그로 행실로 인해 그의 곁에 있던 자들 중에 죽거나 귀향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급기야 1418년(태종 18년) 세자가 된지 14년 만에 양녕 대군으로 강봉되었으며, 궁에서 쫓겨나 이천에서 살게 되었다.   

그 뒤에도 양녕의 방탕함은 멈추지 않았다. 남의 밭을 함부로 빼앗고, 여자를 도적질하고, 기생을 몰래 들여 섹스를 즐기고, 상왕 태종에게 상한 매를 바치는 등등 세종 대에 양녕을 벌주자는 신하들의 요청만 수백 회에 달하였다. 왕이 두 번 바뀌어 세조 대에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양녕의 죄를 묻자는 청이 있을 정도였다.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숨어 몸가짐을 조심하며 살아도 천명대로 살지 모를 일인데, 평생을 악행을 저지르며 방탕하게 살아 수백 차례의 고발을 당했으면서도 한 번도 처벌받지 않고 1462년(세조 8) 69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그의 인생을 두고 말하기를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이 더욱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      


추증하여 시호를 강정(剛靖)이라 하였으니, 굳세고 과감한 것을 강(剛)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제 명대로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 《세조실록》, ‘양녕대군 이제의 졸기’     


만인지상의 자리이기는 하나 또한 만인의 눈길을 받아야 했던 왕의 자리를 내차고 평생 풍류를 즐기며 제 명에 죽었으니 “인생은 양녕처럼”사는게 최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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