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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15. 2020

처음, 혼자, 여행

철의 무게 1

  국가고시 가채점을 했다. 전 날 밤을 샐 정도의 떨림이 무색할 정도로 꽤나 잘 봤다. 그 동안의 나에게 상을 주고자 혼자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용돈을 차곡차곡 모은 것으로는 해외여행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외국에 나갈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외가가 있기도 하고 여러 번 가봤던 만만한 제주도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책을 넣어다니던 가방에 옷 몇 가지와 보물같이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 펜 하나를 챙겨갔다.           

 

 제주에 도착한 첫째 날,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구좌읍 송당마을이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날씨조차 확인하고 오지 않은 터라 눈이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센치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동안 여유 없던 삶에 마음을 닫고 살았었는데 묵게 된 게스트하우스에서 울산에서 온 아주머니, 수영강사 오빠, 소박한 사장님을 만났다. 첫인사도 나누기 전에 그들과 숙소 근처 오름에 올랐다. 첫 10분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조용했고 그 다음 10분은 ‘생각보다 힘이 드네요’ 등의 멋쩍은 대화가 오갔다. 그 다음 10분은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만나 이 추운 날에 오름을 오르게 되었을까 하는 농담도 주고받게 되었다. 내려오는 동안에는 하하호호 웃기까지 했다. 멀리서 본 사람이 있다면 가족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울산에서 온 아주머니는 나랑 같은 방을 쓰셨는데 무려 내가 먼저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는 젊은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밥을 먹자고 한 것에 대해 놀라셨고 난 60이 넘으신 연세에 혼자 여행을 즐기시는 점에 놀랐다. 홀로 달밤 마라톤도 2회 완주하셨으며,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오셨다고 한다. 수영강사 오빠는 시간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떠난다고 했다. 여름휴가 때는 1주일 간 혼자 그리스에 다녀왔다고 했으며 몇 주 전 주말에는 휴양지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내 시선으로는 참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본인은 삶이 답답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장님께서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큰 회사를 오랫동안 다니시다가 제주에 터를 잡으시고 게스트하우스를 여셨다. 그들은 주부, 수영강사, 숙박업 사장님이기도 하지만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모두 지구별 여행자였다.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 듣다 보니 ‘드디어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왔구나‘ 했다. 낯선 상황, 낯선 분위기, 낯선 이야기들로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피어났다. 무엇하나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내가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일찍이 침대에 누우려고 하는데 괜스레 벅차올랐다. 펜을 잡아 오늘의 감정을 꾹꾹 눌러 적으며 하루를 마무리해 본다.     

  

  제주에서의 둘째 날은 참 재밌는 하루였다. 예상은 했지만 아침부터 비바람, 눈보라가 번갈아가면서 난리였다. 계획에 없었지만 이른 아침, 기분이 좋아 숙소 근처 카페에 들려 걸쭉한 대추차를 한 잔 마셨다. 인생 첫 대추차였다. 대추차가 뭐라고 내가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누군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시골 어느 카페에 들려 대추차나 생각차를 뜨듯하게 한 잔 마셔보는 걸 권해봐야겠다. 아 어쩌면 카페보다는 다방에 들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대추차를 다 마시고 직행버스를 탔다. 건축물로 유명했던 유민미술관으로 향했다. 한 겨울의 비바람은 정말 무서웠다. 소중한 우산을 다 부러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우비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공중전화부스에 몸을 숨겨 이제 어찌해야 하나 한참 생각했다. 한숨만 나왔다. 이런 고난과 역경을 겪고 미술관에 가다니? 미술에 조예가 굉장히 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희생당한 우산, 우비를 위해서, 그리고 여기까지 온 오기로 남은 길을 계속 갔다. 도착해서는 지금까지 왔던 비바람의 딱 두 배가 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걸어서 간지 날아서 간지 모를 정도였다. 일단 도착은 했다. 온 비를 다 맞아가며 사진을 찍을 정도로 건축가 안토 다다오의 건물은 멋졌다. 잠시 고민했던 것이 모두 잊혀졌다. 미술관 일정을 마치고 다시 송당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핑계 대기 싫지만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류장 옆 해장국집 냄새가 나를 애타게 불렀다. 외면이라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인지라 냉큼 들어가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먹었다. 부른 배와 함께 숙소로 돌아오니 눈보라가 다시 몰아치기 시작한다. 오 신이시여. 잠시 침대에 누워 후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 한겨울에, 어쩌자고 두꺼운 잠바 하나 안가지고 왔을까?’ ‘예방적으로 감기약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 ‘핫팩이라도 사올 걸 그랬다’ 등등. 그러나 후회한다고 눈 앞에 패딩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며 감기약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핫팩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달라질 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알고 동네 투어를 하기로 했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아 참, 가는 길에 장성한 진돗개 4마리가 일렬로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강아지는 좋아하지만 개는 무서워하는 터라 200미터 남짓한 거리를 정말 식은땀을 흘려가며 걸었다. 아마 누군가 목격했으면 벌칙 수행 중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알고 보니 평소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핫플레이스라는 이 카페는 마침 손님이 없었고 산장 분위기에서 멍때리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렇게 위스키가 들어갔다는 시그니처 메뉴 ‘아이리쉬 커피’를 멋들어지게 주문하고 홀짝홀짝 마시고, 모닥불 앞에서 취했는지 살짝 잠이 들었다. 재밌었다.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해놓고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해 틈만 나면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서는 외로운, 그래서 나는 혼자 있고 싶었던 건가 혼자오기 싫었던건가 헷갈릴 정도였다. 둘째 날도 숙소에서의 이야기 시간은 계속되었다. 이번엔 중학생 상담교사를 하고 있는 언니와 단 둘이었다. 흘러가는 인연이라고, 상담교사라는 직업 덕분에 더 마음이 열렸는지 모르겠다. 어깨가 너무 무거워서 힘이 들다고 그 한 마디를 돌고 돌아 몇 시간이나 했다. 돌아온 대답은 ‘그렇구나’ 한 마디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한마디는 너무 뜨거워서 데일정도였고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신기하게도 나를 위로해줬다. 말이 위로한건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 얘기를 터놓아서 마음이 편해진건지, 하여튼 세상을 얻은 것 처럼 잠이 잘 올 것 같다. 그렇게까지 혼자를 고집하며 수행하고 싶던 미션은 “마음 내려놓기”였는데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유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를 그 짐을 내려놨다. 내가 그 간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이 짧은 날들로 이리 가벼워질 수 있었다는게 허무해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내 안의 내가 뭐라고 자꾸 말을 건넨다. 욕심내지 말고, 자책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고, 움츠러들지 말자. 이렇게 용기의 주인장은 모르는 새에 내 용기는 그렇게 커져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지나 태어나 온실 속에 자라고 그로부터 20년 정도가 지나면 야생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이 세상은 너무 거칠어서 야생으로 가는 길이 많이 버겁다. 그 힘든 길에서 힘을 얻는 첫 번째 단계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돌아오는 대답 대부분은 아마 “힘 내”일 것이다. 힘 내라고 해서 힘이 난다면 지금 지구는 헐크 투성이겠지. 그래서 내린 결론은 때로는 침묵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할 말이 많을 때, 차마 입 밖에 내뱉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함축시켜 ‘그냥’이라는 말을 한다. 때로는 그 지구별 여행에 동참해주는 조용한 응원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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