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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15. 2020

처음, 엄마랑, 여행

철의 무게 2

  웨이팅게일(병원 취업이 결정되었으나 아직 발령을 받지 못한 발령 대기중인 간호사들의 별명) 시절 인생에 또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가 엄마와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엄마랑 둘이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필요조건들이 있었다. 두 사람의 경비로 200만원 이내로 계획해야 했고, 큰 야시장도 구경할 수 있어야 했고, 마사지도 받을 수 있어야 했으며, 안전해야 했다. 그 충분조건으로 태국 방콕으로 결정되었다. 해외여행에 대해 엄마보다 몇 번의 경험치가 더 있다는 허세를 부리며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밤낮으로 괜찮다고 소문난 숙소를 찾았고 관광지들의 후기를 검색하는 등 거의 여행사가 된 듯했다. 짐을 챙기면서도 서로의 옷을 보며 이상하다며 디스전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비행기 탑승 전 공항에서 먹는 식사 메뉴 결정에도 티격 태격이었다. 그렇게 보통의(?) 모녀들처럼 출발 준비는 끝났다.      


  방콕에 밤 늦게 도착했다. 택시에서 잘못 내렸고 구글 길찾기를 반대로 보는 바람에 두 여자는 의도치 않게 캐리어를 끌고 후미진 골목 이곳 저곳을 탐색하게 되었다. 나는 이 2인 여행의 가이드를 맡았기 때문에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쎈 척을 했다. 골목에서 주무시는 분들의 사이를 앞장 서서 걸어가는 내내 사실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렸고, 후에 엄마에게 들으니 그 때 내 어깨는 쥐며느리 같이 쪼그라져 있었다고 한다. 서둘러 잠을 잤고 아침 첫 일정이 시작되었다. 아 참, 첫 일정을 시작하기 전 또 나의 실수로 호텔 방에서 엄마 발이 다쳐 잘 걷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급하게 약국에서 테이핑 밴드와 부목을 구해 임시방편으로 미니 발가락깁스를 만들어서 다녔다. 발을 쩔뚝이면서도 엄마는 방콕 최대의 시장이라는 짜뚜짝 시장에서 배에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구경을 했고 호텔로 들어갈 때면 매번 과일을 한 궤짝씩 사가지고 들어갔다. 과일 사진을 찍어놓지 않아 보여줄 수 없지만 ‘내일 아침 저 과일을 가지고 나가 팔아야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과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우리 둘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매 순간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예약해놓은 마사지에서 나는 굉장히 만족했지만 엄마는 계산을 하기 싫을 정도로 불만족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의 검색 끝에 어렵게 찾은 맛집에 가면 입에 맞지 않다며 엄마는 퇴짜를 놓았다. 호텔 조식 레스토랑에서 태국 이름표를 달고 있는 중년의 직원에게 “한국 사람이죠?” 라고 물어보고 대단한 뷰로 유명한 루프탑 바에 가서는 서비스가 좋은 종업원에게 웃으며 “아이고 총각 멋있다. 잘생겼다. 우리 딸 예쁘죠?”를 연발하는 K-줌마(한국의 아줌마, 엄마를 부르는 애칭)의 넉살을 보고 부끄러움은 내 몫이 되곤 했다. 엄마 피셜 남의 나라에서 저녁 7시면 위험하다며 호텔 방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럴바엔 무성영화가 낫겠다 싶은 호텔 tv로 태국 배우들의 멋들어진 연기를 보며 밤마다 캔맥주에 컵라면을 전전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예산 안에서 예약해놓은 디너크루즈를 타러갔다. 중간정도 혹은 중간보다 조금 아래 수준의 디너크루즈였다. 물론 엄마한테는 엄청 좋은 거라며 거짓말 조금 섞었다. 이름에 크루즈라도 들어가니 엄마 기분은 굉장히 좋아보였다. 디너크루즈에 간다며 옷도 신경써서 입었다고 한다. 대기하는 동안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크루즈를 타러 간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많이 뜨끔했다. 용돈이라도 모아 좋은 크루즈를 예약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크루즈 탑승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여행 상품인만큼 당연하게도 한국인 아줌마 아저씨가 대부분이었다. 운 좋게도 우리는 명당자리에 배정받았다. 관광객들을 위해 뱃머리에서는 동남아 가수의 한국 노래 메들리 공연이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노사연의 ‘만남’이라는 곡에 엄마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라는 후렴구도 누구보다 크게 불렀다. 동영상을 찍어 아빠에게도 바로 전송해줬다. 잊을 수 없는 짜오프라야강의 야경과 대비되는 갑자기 분위기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에 이게 뭐나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깔깔거리며 웃으며 강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 호텔들, 고급 백화점들의 야경을 보는척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행복해 보이는 인도인 가족들을 보는 척했다.      


  둘이 합쳐 오만원 하는 크루즈에서 맛없는 저녁식사를 하며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말을 들었다. 대학 시절 ‘다른 친구들은 간다는데 나도 가고 싶어’ 한 마디로 여행을 꽤나 다닌 편이다. 어릴 적부터 남들한테 기죽일 수 없다는 사명으로 나를 키운 엄마는 다 해줬다. 나는 더 좋은 것도 타봤고 더 맛있는 것도 먹어봤다. 나보다 30년 더 산 엄마보다 나의 25년 동안이 훨씬 풍족했다. 그냥 눈물이 났고 숨기기 위해서는 야경이라도 봐야 했다. 크루즈에서의 짜디 짠 행복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돌아오는 탔다. 밤비행기로 한국에 날아오는 동안 왜 그렇게 울컥하던지 한 숨도 못 잤다. 갑자기 철이 들어버렸다.     


  엄마랑 단 둘이 집에서 술 한 잔 하는 시간도 불편해 하던 사람이다. 방문은 항상 닫혀있었으며 가족과 함께 있어도 마치 원룸에서 자취하는 자취생처럼 지냈다. 심지어 가족여행도 잘 따라다니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하면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오프라 윈프리의 한 마디를 떠올리며 웨이팅게일로, 여유로운 백수생활로 일주일 간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 엄마 발이 다쳤지만 타국에서 당장 치료가 필요할 만큼의 심각한 부상이 아님에, 연일 35도 이상의 무더위에서 열사병이 걸리지 않은 것에도 감사하기로 했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그 무엇도 충분치 않다고 한다. 난 항상 부모님의 사랑을 갈망했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누구보다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내가 지하철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있다가 새치기를 당했을 땐 외국인에게 거침없이 “저기요”라고 말을 하기도 했고 본인보다 어린 딸 옆에서 못나보일 수 없다며 아침이면 옷을 수 차례나 갈아입기도 했다. 심지어 다친 발을 끌며 곧 죽어도 호텔 수영장에서 인생샷을 찍어야 한다는 딸을 위해 선베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동안이나 물에서 노는 딸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여행을 잘 다녀왔냐는 친구들에게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내일이라도 다시 출발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바로 계획하고 실천하시라. 당신은 가이드가 되어야하고, 네비게이션이 되어야하고, 계산기가 되어야 하고, 짐꾼이 되어야 하고, 구글이 되어야 하고, 전담 마사지사가 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몇 백배는 더 커다란 행복이 당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장담해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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