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생이지만 둘째는 뱃속에서부터 달랐다. 큰 아이는 막달까지 스멀스멀 꿀렁꿀렁 천천히 움직였다. 은근슬쩍 발을 뻗었다가도 튀어나온 배를 누르면 슬며시 제 발을 거둬들였다. 둘째는 달랐다. 뱃속에서도 우당탕탕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막달엔 어찌나 힘이 세었는지 발길질을 할 때마다 놀랐다. 튀어나온 배는 아무리 눌러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 녀석이 나올 줄 알았다. 그렇다고 딸이어서 실망했단 말은 절대 아니다.
임신 중 태아의 움직임은 아이들의 성격에 그대로 반영됐다. 큰 아이는 천천히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조용히 사고 치고 혼자 즐거워했다. 작은 아이는 한 달 만에 뒤집기에 성공하더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어 다니고 돌 무렵엔 집안 구석구석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옹알이가 시끄러울 수도 있다는 걸 둘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작은 아이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옹알이를 했고 그 덕분인지 말도 엄청 빨리 시작했다. 뭐든 빠르고 급하게, 거침없이 일단 돌진하는 아이! 그게 우리 집 둘째다.
"안냐세요?"
작은 아이는 말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인사에 꽂혔다. 돌도 안 된 아이가 배꼽 인사를 하며 '안냐세요?'라고 말하면 다들 귀여워하며 칭찬해주니까 그게 좋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 때 생겼다. 아이는 그 어른이 인사를 받아줄 때까지 계속 '안냐세요!'를 외쳤다. 배꼽 인사를 수도 없이 하면서. 어른이 아이와 눈을 맞추고 "그래, 안녕? 아가야?"라고 말해줘야만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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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인사 놀이가 한창일 때는 목욕탕도 가기 힘들었다. 아이는 목욕하는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하느라 분주하고, 어른들은 때를 밀다 말고 엉거주춤한 채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고... 하지만 봐줄 때까지 계속 인사하는 아이 앞에서 어른들은 결국 "안녕"이라는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잡아다 놓으면 어느새 또 다른 곳에 가서 인사하고 있는 아이 때문에 지쳐서 나도 결국 목욕탕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헐렁한 런닝에 기저귀 바람으로 가게 앞에서 놀던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잠깐 컴퓨터 매장을 운영할 때였다. 당황해서 찾으러 나섰는데 저만치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게 보였다. 다급하게 아이를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지 아이는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걸음이 제법 빨랐다. 아이 앞에는 왠 낯선 아줌마가 가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 아줌마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안냐세요?" 큰소리로 외치고 잠깐 서서 배꼽 인사를 하고, 또 종종걸음으로 쫓아가서 인사를 외치고 또 배꼽인사를 하고... 그러느라 아이는 엄마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낯선 아줌마는 흘낏 돌아보더니 더 빠르게 걸었다. 숨이 턱에 닿게 뛰어서 아이를 잡았을 때 아줌마가 다시 돌아봤다. "그 집 아이예요? 아유, 애가 왜 자꾸 따라와?"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쏘아붙인 아줌마는 이내 횡단보도를 건너 멀어져 갔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마터면 아이를 잃어버릴 뻔했으니! 이글이글 타는 한낮의 더위에 아이 얼굴은 벌겋게 달아있었다. 너무 더워서였는지, 끝내 '아가도 안녕?'이라는 상냥한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였는지 아이는 내가 안아 올리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아이를 업고 돌아오면서 내가 뭐라면서 아이를 달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이를 혼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던 것도 같다. 인사도 사람 가려가며 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 거냐고 남편한테 하소연하듯 물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은 세상이 더 삭막하게 느껴진다. 지금 같으면 그때 난 작은 아이에게 뭐라고 했어야 할까? 그때도 못한 답을 지금은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