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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Jul 21. 2022

꼭 분홍색 싱크대여야 해!

육아는 처음이라

큰 아이는 순한 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잠투정도 많이 줄어 우리 집에도 나름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는 엄마랑 상관없이 주로 혼자 노는 편이었다. 걷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집안 곳곳을 탐색하고 맛보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조용하게 처리(?)했다. 거실 가득 밀가루를 뿌려놓고 하얘진 두 손으로 손뼉 치다가 눈이 마주치면 해맑게 웃는 아이! 엄마 귀찮을까 봐 조용히 혼자 잘도 놀았다.


친구랑 30분 넘게 통화를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물었다.

"서영이는 자는 거야?"

"아니, 저쪽에서 혼자 놀아."

"와, 진짜 순하다! 엄마가 30분이나 수다를 떠는데 찾지도 않네?"

맞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나 순하다. 뿌듯해하며 노는데 정신 팔린 아이에게 다가갔더니... 미처 냉장고에 넣지 못한 우유팩으로 신나게 샤워 중이셨다! 아이고 순한 놈! 




나는 조용하게 위험한(?) 녀석에게 나름대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다양한 장난감을 제공했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질 염려 없는 스텐 그릇과 사이즈별 냄비들을 싱크대 아래 장에 늘어놓고 아이가 마음껏 꺼내어 놀게 했고 매일 철 지난 잡지랑 신문지를 잔뜩 모아놓고 아이에게 마음껏 찢게 했다. 종이 찢는 게 두뇌발달에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탓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아이 손에 들려주기도 했다. 조그만 손으로 조물조물 형태를 잡느라 반죽과 씨름하는 시간이 꽤 길어서 그새 편하게 내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얀색 전지를 사다가 벽에 붙여놓고 마음껏 낙서도 하게 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엄마 아닌가 하며 새삼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소꿉놀이나 자동차 같은, 남들 다 사주는 장난감은 그때까지 하나도 안 사줬다. 깔끔 떠는 성격도 아닌데 유난히 플라스틱 장난감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 걸 물고 빨면서 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런 걸 사주기에 좀 빠른 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다가 아래층 민지 엄마를 만났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 더 정이 갔다. 내친김에 민지 엄마가 차 한잔 하자고 나를 잡았다. 주변머리가 없어 이웃과 왕래가 거의 없던 나는 민지 엄마의 초대가 반가웠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는 민지랑 제법 잘 놀았다. 문제는 민지 엄마가 새로 사 온 장난감이라며 소꿉놀이 세트를 바닥에 촤르르 쏟아주면서 생겼다.

"줘! 줘! 내 거야!"

잠깐 사이에 민지가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는 뭔가를 부여잡고 야무지게 등을 돌렸다.


"서영아, 이건 민지 거니까 민지 줘야 해."

당황해서 뺏고 보니 앙증맞은 분홍색 싱크대였다. 아이를 달래면서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그 와중에 우리 아이라도 울지 않는 게 다행이라 여기며. 고개를 푹 숙인 아이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아이가 걸음을 멈춘다.


"왜? 걷기 싫어? 업고 갈까?"

아이는 대답 없이 한동안 서있더니 갑자기 주저앉아 운다.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윗 계단에 엎드린 채 펑펑 운다! 잠투정 빼고는 보채는 일도 없고, 뭘 달라고 억지 한 번 안 부리던 녀석인데... 그런 아이가 엎드려 펑펑 운다! 그 순간 아이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아이는 태어나서 그렇게 조그맣고 예쁜 싱크대를 처음 봤다. 알록달록 예쁜 장난감 그릇들도 처음 봤다.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여태 가지고 놀던 진짜 그릇들과 비교도 안되게 귀엽고 예쁜 장난감들을 충분히 만지고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갑자기 나도 눈물이 났다. 못난 초보 엄마 탓이다. 두 돌쯤엔 소꿉놀이 장난감 사주면 안 된다고 누가 그랬냐고! 쓸데없이 창의력 타령이나 하느라 아이가 새로운 대상을 접할 기회를 주지 않아 이 난리가 난 것이다. 우는 아이를 안고 집에 들어와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오늘 당장 소꿉놀이 장난감 사와! 꼭 분홍색 싱크대가 들어있어야 돼!"

그리고 아이를 안고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하면서.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그 조그만 손을 내밀어 내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다시 울컥! 아~ 난 갓 두 돌 지난 이 녀석보다 철없는 엄마였다. 

퇴근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남편 손엔 소꿉놀이 장난감이 들려있었다. 전화기 너머 울먹이던 내 목소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이는 서러웠던 그 순간을 싹 잊어버리고 분홍색 싱크대를 들고 방긋 웃었다.



출처 : https://pixabay.com


아이는 한동안 다른 놀잇감은 쳐다보지도 않고 소꿉놀이 장난감만 갖고 놀았다. 밥을 먹을 때도 장난감을 끌어안고 있을 정도였다. 다시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고 벽에 그림을 그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내 아이는 남들과 다르게 키운다는 자만심에 취해 내 맘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창의력 운운하고 플라스틱 유해성을 따지기 전에 내 아이 마음부터 살폈어야 했다.



* 여기서 아래층 민지는 가명임. 너무 오래전이라 이름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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