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영 Oct 04. 2022

상실과 우울, 그리고 타자

키티 크라우더, <아니의 호수>

프로이트가 살았던 시절은 히스테리의 시대였다. 히스테리는 억압된 무의식이 증상으로 발현되어 주체를 괴롭히는 걸 말한다. 모든 것을 억압당해야 했던 유럽의 귀족층, 부르주아 계층의 여자들에게서 특히 히스테리가 심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억압당하고 살아야 했던 가 보다.


현대는 히스테리보다는 우울증의 시대다. 우울은 뭔가를 상실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정신분석에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기에 우울증도 더 많이 발생한다고 본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워서 오히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상실의 시작은 엄마다. 태어나 모든 것을 주던 엄마와 분리되어 홀로 서야 한다는 건 극심한 상실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상실을 극복하고 세상에 나아가야 욕망하는 주체로 설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도 여전히 엄마(또는 나를 지지해주는 존재)와의 분리를 거부하면, 그러다 결국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극심한 우울증을 만날 수 있다. 


키티 크라우더의 그림책 <아니의 호수>에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니는 거의 매일 기분이 안 좋다. 마음속에 어두운 뭔가가 가득 차 있고 우울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았기 때문이다. 아니는 자기에게 고약하게 굴던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의 눈이 세 개의 섬이 있는 호수처럼 깊고 아름답다고 했던 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그 말은 아니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엄마의 애정을 확인해주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키티 크라우더, <아니의 호수>

그래서인지 아니는 늘 호수를 바라보았고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세 개의 섬을 좋아했다. 혹시라도 호수 저편에 자기와 같은 누군가가 있을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아니는 엄마로부터 버려져 혼자 남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자기와 같은 누군가는 자기를 닮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기와 동일시가 가능한 누군가, 즉 엄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떠난 엄마가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 나서지는 못한다. 아니는 엄마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를 거부한다. 실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는 막연히 누군가가 – 의식적으로는 누군가이지만 사실은 엄마 – 호수 건너편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자신을 달래 보지만, 그것만으로 아니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아니는 엄마를 부여잡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엄마를 미워한다. 고약하게만 얘기하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한 아니는 엄마 대신 자신을 세상과 유리시킨다. 행복해하는 주변이 싫어지더니 자기가 잡은 물고기, 창가에 있는 의자, 심지어 일 년에 한 번 오는 우편배달부까지 지겨워진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지겨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매일 아침 호수 저편을 유심히 살폈지만 아니가 기다리는 누군가일 엄마는 없었다. 아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미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증오를 더는 견딜 수 없어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기로 한다. 


아니는 집안을 정돈하고 무거운 돌을 찾아 배에 싣고 세 섬으로 다가간다. 주위의 모든 것들에 작별 인사하면서. 아니가 집안을 정돈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에 작별인사를 하는 행위는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아니는 무거운 돌을 몸에 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완전한 죽음. 실수로라도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멜랑꼴리에 빠진 주체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 상실의 고통이 극심해지면 떠난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미움으로 변질시킨다. 상실된 대상으로부터 회수된 리비도는 주체에게 돌아와 그 대상과 동일시된 자아를 미워하는 에너지로 쓰인다. 대상의 대체가 불가능해진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극심한 미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아니도 그랬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돌까지 매달고 물에 뛰어든 것이다. 아니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들은 멜랑꼴리에 빠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아니는 멜랑꼴리가 아니라 멜랑꼴리에 버금가는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배를 타고 자기가 좋아하던 세 개의 섬까지 가서 물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아니는 평소에 호수 안에 있던 세 개의 섬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섬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다며 께름칙해했지만 아니는 개의치 않고 자주 섬 근처에 가서 고기를 잡을 만큼 섬들을 좋아했다. 바람도 물도 세 섬에 희망이 있는 듯이 속삭였지만 자기만 두고 죽은 엄마에 대한 원망과 끝내 엄마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커서 죽음을 택했다. 아니가 마지막 순간에 세 섬을 찾아간 것은 바람과 물이 말한 희망을,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갈망하던 삶의 끈을 혹시나 그곳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 바람이 표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는 호숫가 물풀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세 명의 거인이 아니를 구한 것이다. 그 순간 아니는 다시 태어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타자(엄마) 대신 세 명의 다른 타자 앞에서 아니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타자의 대체에 성공한 주체의 안도감이 주는 무한 기쁨이 아니의 얼굴을 빛나게 했다.


그런데 아니를 구한 세 명의 거인이 아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완전한 성인이 되기 전에 바다에 있는 여자 거인과 결혼해야 하는 저주에 걸려있는 자기들이 바다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아니를 구함으로써 완벽한 타자로 여겨졌던 그들이 아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들도 결여를 가졌다는 사실이 아니를 욕망하는 주체로 만들었다. 


이제 아니에게는 촉박하지만 주어진 기일 안에 그들을 안전하게 바다에 도착하게 하리라는 목표가 생겼다. 아니는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나침반의 도움을 받고 지치면 에밀의 모자에서 잠들고 배고프면 물고기를 먹으며 숲과 산을 건넜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바다에 도착했고 두 명의 여자 거인을 만났다. 세 명의 거인 중 두 명만이 짝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는 홀로 남은 에밀과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아니는 저주가 두려워 눈물 흘리는 에밀을 다독여 재우고 자신도 잠들었다. 지친 아니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니는 깜짝 놀랐다. 


한 남자가 작은 배를 타고 아니에게 다가왔는데 그가 바로 에밀이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타자들의 도움을 받은 아니, 그로 인해 욕망하는 주체로 거듭난 아니는 자신의 결여뿐 아니라 타자의 결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에서 맛본 똥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