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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Dec 15. 2021

퍼커셔니스트 조성호의 기록

호두까기인형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무대에 오르는 <호두까기인형>.

이 발레 공연의 최다 연주자라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퍼커셔니스트가

특별한 크리스마스 추억을 선물한다.



호두까기인형 x 타악기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의 3대 발레에 속하는 <호두까기인형>은 19세기 독일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Ernst Hoffmann)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발레 공연이에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주인공 소녀 마리가 꿈속에서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인형과 상상 세계로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레퍼토리죠. 1892년 초연 이후 다양한 안무 버전이 있는데, 국내 발레단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은 볼쇼이발레단 버전이에요. 또 하나의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은 마린스키발레단 버전을 공연하죠.


출처: 국립발레단


서양 음악은 팀파니를 빼면 타악기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데, <호두까기인형>에서는 큰 편이에요.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타악기가 쉬는 부분이 거의 없거든요. 만약 타악기를 빼고 공연한다면 연출이 싱거워지겠죠. 팥 없는 찐빵처럼요. 타악기는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악기를 두들기거나 쳐서 음악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가짓수가 많고 다양한데, 음정의 유무에 따라 종류를 나누기도 해요.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 공연에 들어가는 타악기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오케스트라의 기본적인 구성에 가까워요. 팀파니 외에 베이스 드럼, 심벌즈, 스네어 드럼, 글로켄슈필과 여러 소품 악기가 있어요. 소품 악기는 탬버린, 캐스터네츠, 서스펜 심벌, 트라이앵글, 차임벨, 라쳇 등이죠. 커튼콜이 시작될 때 항상 연주하는 크리스마스 페스티벌 곡을 위한 크리스마스 벨도 있고요. 


(좌) 산타가 썰매를 끌 때 나는 소리로 익숙한 크리스마스 벨 (우) 태엽 감는 소리를 내는 라쳇 / 출처: 에듀뮤지카


오케스트라에서는 형식적으로 팀파니 파트와 타악기 파트를 구분하는데, 국내 오케스트라의 정기 공연에서는 팀파니스트가 있어도 프로그램 중간의 협주곡 정도는 타악기 부수석이 팀파니를 연주하기도 해요. <호두까기인형>에서는 팀파니 연주자를 고정으로 두고 타악기 연주자를 세 명으로 구성해요. 스네어 드럼 1명, 글로켄슈필 같은 건반 악기 1명, 심벌즈 1명. 소품 악기는 타악기 연주자들끼리 서로 바꿔가면서 연주하고요. 저는 <호두까기인형>에서 심벌즈를 중심으로 소품 악기를 맡고 있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타악기 단원들과 함께


<호두까기인형>에서 돋보이는 타악기 중 하나로 스네어 드럼을 꼽을 수 있어요. 병정 인형에 북이 매달려 있어 스네어 드럼 소리가 인형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대신하죠. 파티 도중 생쥐들의 습격을 받아 장난감 병정이 나오는 장면에서 특히 잘 드러나요. 심벌즈는 악기 특성상 공연의 클라이맥스에서 사용돼요. 불꽃이 마지막에 터지듯이 음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강한 타격감으로 극적인 효과를 주면서 장면 전환을 하는 거죠. 또 인형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나 결혼식 장면에서는 탬버린이나 트라이앵글 같은 소품 악기 소리가 동화적인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요. 타악기가 전체적인 흐름에서 주목받는 악기는 아니지만, 다른 악기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음색과 리듬을 담당하고 있어요.


2013 예술의전당 SAC on Screen -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호두까기인형 x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예전에는 국립발레단과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은 국립극장 전속 단체였는데 2000년에 예술의전당에 입주했어요. 저는 1989년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 입단했기 때문에 그해 국립극장에서 처음 <호두까기인형>을 공연했죠. 첫 공연은 그저 열심히 했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그동안 공연이 취소된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2007년과 2020년이었어요. 작년 연말에는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돼서 공연장 대부분이 셧다운됐고, 연습에 들어가기 전 국립발레단 단원 중에 확진자가 나와서 공연이 아예 무산됐죠. 국립발레단도 상심이 컸고, 우리 단원들도 안타까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공연하지 못한 충격과 상실감은 2007년이 더 컸어요. 그해 12월 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라보엠> 공연 중에 화재가 일어났어요. <호두까기인형> 공연을 앞두고 벌어진 대형 참사였죠. <라보엠>과 <호두까기인형>을 12월 정규 시리즈로 기획하는 첫해였거든요. 당시 뉴스에도 크게 보도됐고, 오페라극장은 10개월간 공연 전면 취소가 결정될 만큼 피해를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당시 공연에 등장하는 촛불에서 커튼으로 불이 옮겨붙었는데, 단원들은 연주하던 도중에 불길을 발견해 우왕좌왕했어요. 떨어진 불덩이에 팀파니는 타버렸고요. 당황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우는 단원들부터 서둘러 악기를 챙겨 대피하는 단원들까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어요. 정신없이 밖으로 나와서 보니 오페라극장 지붕까지 불기둥이 솟구치더라고요. 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배우와 무대 스태프, 연주자, 관객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사고였어요. 그 뒤로 촛불은 조명으로 대체됐고, 무대 옆에는 소방서 직통 전화가 생겼어요. 연주자들은 소방호스를 빼서 발치에 두고 연주하곤 했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아찔해요.


예전에는 <호두까기인형>에서 타악기 연주자가 다양한 효과음을 들려주다가 만들어낸 해프닝도 있었어요. 총을 쏘는 장면이 있는데, 화약 조절이 잘 안돼 소리가 너무 크게 나는 바람에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죠. 이 효과음을 들을 수 있는 다른 곡도 있어요. 신년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사냥' 폴카에도 총소리를 내는 부분이 나오거든요. 요즘은 관객들에게 미리 알리고 진행해서 그때만큼 놀랄 일은 없어요. 그래도 갑작스러운 소리가 주는 긴장감도 현장의 묘미 아니겠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2020 신년음악회> 1부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제 왈츠' Op. 437 (2:30)



호두까기인형 x 퍼커셔니스트 조성호


저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면서 작은 북과 드럼을 배웠어요. 당시 유행한 재즈 드럼과 그룹사운드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악기를 두드리면 스트레스가 풀려 타악기의 매력에 푹 빠졌죠. 타악기를 전공하려면 팀파니, 스네어 드럼, 마림바로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그 후에 전공 악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팀파니부터 드럼 세트까지 모든 타악기를 다 다루게 돼요.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담당할 악기가 정해지고요. 저는 원래 북을 좋아했는데, 심벌즈를 많이 치다 보니 심벌즈에 애착이 더 가더라고요. 북은 음의 지속성이 오래 가지 않아요. 반면에 심벌즈는 여운이 오래 가고, 울림이 공연장으로 퍼져 희열을 느끼게 하죠. 울림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악기에요.




요즘은 곧 은퇴를 앞둔 시기여서 그런지 단원으로 활동하던 초창기의 일들이 자주 생각나요. 무엇보다도 첫 예술감독이신 홍연택 선생님의 발자취를 더는 느껴볼 기회가 없어 굉장히 아쉽죠. 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셨던 선생님은 국립교향악단이 KBS 교향악단으로 바뀌자 1985년에 예술단체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창단하셨어요. 제게는 대학 선배님이기도 해서 대학교 3학년 때 객원으로 창단 연주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초창기에는 연습실이 없어 국립극장 로비에서 연습했는데, 공연이 없는 오전 시간에 단원들이 손수 의자와 악기를 챙겨 연습할 자리를 만들고 다시 치우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또 IMF 때 지원이 끊겨 선생님께서 단원들을 모아 놓고 월급을 줄 수 없어 미안하다며 만세 삼창을 하신 기억도 생생해요. 상황에 맞지 않았지만, 나라를 잃은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아팠죠.


그 시절을 함께한 단원들이 현재 열 분 정도 남아 계시는데, 모두 저처럼 은퇴를 앞두고 있어요. 그래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신입 단원들에게 창시자의 정신과 우리의 역사를 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2018년 <정치용 예술감독 취임 기념 음악회>에서 홍연택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연주하고 싶어 하시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단발적인 공연보다는 그분의 흔적을 꾸준히 되새길 수 있는 토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쓰리 테너'를 비롯해 세계 최고의 유명 성악가, 연주자들과 협연하며 국립교향악단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뿌듯해요. 음악 말고는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34년 차 퍼커셔니스트로서 카네기홀이라는 꿈의 무대에도 올랐으니 그보다 더 큰 행복도 없고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치용 예술감독 취임 기념 음악회> – 브루크너 교향곡 8번 c단조


저에게 <호두까기인형>은 한해의 마침표 같은 공연이에요. 연말이면 선보이는 정기 공연이라서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공연이 끝나면 '올해가 가는구나'라고 실감할 수 있죠. 올해는 12월 14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호두까기인형>을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국립발레단 단원 확진으로 초반의 8회차 공연이 취소되고 21~26일 공연만 예정대로 진행하게 됐어요. 그래도 작년과 달리 관객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해요. 오셔서 저희가 준비한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함께 풀어보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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