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 리더, 수리공, 심리학자 etc.
2020. 12. 18
지휘자 = 리더, 수리공, 심리학자 etc.
요즘 지휘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시간이 연속되다 보니 지휘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자주 떠오릅니다. 독일에 온 이후로는 앞만 보면서 달리느라 지난 일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편지를 쓰며 여러 기억을 복기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예중 예고 시절 반장을 하며 자연스레 반 합창단 지휘도 맡게 되었어요. 반장을 4년 내내 했는데, 처음 반장을 한 이유는 경상도 사투리가 웃겨서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사투리나 웃기니까 반장으로 뽑더라고요. 합창단 지휘를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제외하면 뮌헨 음대에서 했던 첫 작곡 발표회, 그게 첫 앙상블 지휘였어요. 힘들게 연주자들은 구했는데, 지휘자까지 구할 여력은 없어서 제가 직접 지휘를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지휘가 재미있었고, 지휘자를 구하는게 번거롭기도 하니, 그 이후로도 작품 발표마다 제가 지휘를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지휘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뮌헨 음대 작곡과의 필수 과목이었던 지휘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어요. 기쁜 마음으로 독일 유학을 왔지만, 첫해는 꽤 힘들었어요. 즉흥 음악을 좋아하던 제가 겪어보지 못했던 체계적이고 수학적이며 심지어 철학적이기까지 한 음악적 접근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렇게 첫해는 한 곡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뒤섞인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도 수요일은 항상 좋았어요. 지휘 수업이 있는 수요일이면 음대 친구들과 축구를 했거든요. 물론 지휘 수업도 좋았어요. 전문적인 지휘 수업이 아니라서 각기 다른 전공의 학생들이 투 피아노나 작은 앙상블과 지휘하는 수업이었는데, 직접 음악을 표현하며 함께 호흡하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어요. 집 책상,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력의 싸움을 일삼는 작곡가의 삶과는 사뭇 달랐죠. 언제부터인가 작곡은 의무가 되었고, 피아노 연주와 지휘가 즐거움으로 변해있었어요. 작곡과 2학년 때 피아노, 지휘 입시도 따로 보았고, 다행히 둘 다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전공 3개는 너무 벅차 나중에 피아노는 그만두게 되었지만요. 그래도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며 얻은 경험과 아이디어들은 지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작곡과 연주와 지휘의 상호작용을 몸소 체험한 거죠.
저에게 있어 '지휘자'라는 직업은 수많은 단어로 치환할 수 있어요. 리더, 경영자, 예술가, 동행자, 수리공, 조율사, 심리학자. 지휘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각기 다른 연주자들이 무대 위에서 최고의 순간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수평적인 관계에서 감정과 생각,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지휘자로서의 많은 방법이 있지만, 제가 가진 가장 좋은 방법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는 일인 것 같아요.
지휘를 공부하면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직접 보여주고 이끌어라"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서 연주하게 내버려둬라"입니다. 완벽히 상반되는 두 문장 사이에서 매일 고민합니다. 짧은 경험이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낄끼 빠빠'. 곡과 마디마다, 사람과 상황마다 다른 유연함으로 무장하고, 가장 적합한 태도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다행히 저는 긴장을 잘 안하는 편이고, 두 팔이 유연한 편이라 느끼는 대로 몸이 잘 움직여주는 편이에요. 그래서 리허설도 많이 안 하고 음악도 편하게 흘러가도록 해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음악이 듣기 편하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모든 음 하나하나에 고민하고 숨 막히게 타이트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지휘자들과 다른 점인데, 제 지휘 제스쳐를 좋아하셨던 마르쿠스 보쉬 교수님도 매번 그 점을 혼내셨어요. 학교를 떠나 처음으로 참가했던 스위스 그슈타드 메누힌 페스티벌에서도 심사위원이자 멘토로 오신 요하네스 슐레플리(취리히 음대 교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고요. 네메 예르비상을 놓고 겨루는 결선 며칠 전, 제가 차이코프스키 6번 비창 교향곡 1악장을 리허설할 차례였어요. 슐레플리 교수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제발 진심을 담아 지휘하라"는 조언을 하셨어요. (독일인이 가장 많이 쓰는) "Bitte(제발)"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쯤 반복하신 것 같아요. 진심 어린 조언이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죠. 그슈타드에서 3주간 정말 좋은 오케스트라와 멋진 곡들을 즐겁고도 행복하게 연주하며 편하게 지냈거든요. 그런 제가 차이코프스키가 인생 최악의 상황에서 작곡한 '비창'을 지휘해야 하니 제게 짧지만 강한 한 방을 날리셨던 거예요. 정신이 번쩍 든 저는 평생 가장 슬펐던 순간을 떠올리며 지휘를 했고, 그 무대를 마치고 나설 때는 눈물이 고였어요. 음악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대에서 눈물이 났던 순간이었죠. 지휘 테크닉적으로는 엉망인 수준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동안의 무대 중 가장 좋았다는 평을 들었어요. 그래서 같은 곡으로 결선 연주회 지휘를 할 기회를 얻었고, 그때는 좀 더 침착하고 신중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영상을 덧붙입니다.
2020. 12. 23
유연하고 친절하되 객관적인
제게 가장 어려운 음악이 무엇인지 물으셨죠? 지휘 테크닉적으로 보여줄 게 많지 않은 평면적이고 변화가 거의 없는 음악이에요. 오펜바흐가 대표적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템포의 2/4박자를 10분 동안 하려면 몸이 다 근질 거립니다. 더 보여주고 싶은데 과하면 연주자들에게 방해가 되고, 그냥 쉬어가듯 지휘를 하면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간결하게 지휘해야 하는 작품들은 아직 저의 숙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지휘자가 꺼려하는 근현대 음악이 저는 재밌어요. 레퍼토리가 아닌 곡들은 준비하는 것이 훨씬 까다롭지만 그만큼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개선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다고 여겨져요. 지금 제가 하는 결정과 충돌할 과거의 전통적 해석이 없다는 것도 제 역량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느껴지고요. 물론 현대음악을 안정적이고 멋지게 지휘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오히려 더 도전적인 해석과 표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저의 멘토이신 페테르 외트뵈시 선생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죠. 외트뵈시 선생님은 현대음악의 대가라는 칭호를 갖고 계시지만, 음악적인 접근법은 누구보다 낭만적이시거든요.
지휘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느낌, 자세, 성격이 모두 달라지는 걸 느끼는데, 이게 정말 신기한 경험이에요. 리허설과 연주 전략도 매번 바뀌는데, 현재 저는 첫 만남 때는 50%의 친절함과 50%의 즐거움으로 시작해 두 번째 리허설에서는 50%의 진중함과 50% 실용성을, 연주 당일에는 50%의 표현력과 25%의 신중함과 재치(여유)를 추구합니다.
무엇보다 지휘 비팅, 타이밍이라는 건 초월적인 영역인 것 같아요. 정확한 사인이 어긋나게 하기도 하고, 느낌대로 따라가면 오히려 더 잘 맞을 때도 있어요. 이 생각이 완전히 전복되는 경우도 있어요. 보통은 음악보다 0.1~0.5초 빠른 비팅이 테크닉적으로는 정확한 타이밍인 것 같아요. 하지만 악기마다 필요한 타이밍이 다르기도 해요. 그럴 때는 표정과 심리를 통해 연주자들이 직접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비팅을 아예 주지 않는 게 방법일 때도 있어요. 이렇듯 매 순간 유연한 지휘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에요.
작품에서도, 삶에서도 멋진 유연함을 가진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모두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싶고, 동시에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신중한 말과 행동을 가진 사람이길 바라요. 노이브란덴부르크 필하모닉 단원들과 극장 관계자들도 이제는 저를 한국에서 온 어린 지휘자가 아닌 함께 작품을 만드는 동료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아요. 나이, 국적, 성별을 떠나 신뢰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의 조각들을 조금씩 맞춰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2020년 한 해가 끝나가네요. 여느 독일 사람들처럼 저도 새해가 밝을 때까지 집에서 머물며 겨울잠을 자려고 해요. 2011년 이후로 새해를 한국에서 보낸 적이 없는데, 다음 연말에는 한국을 비롯해 많은 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해지길 소망합니다. 끝으로 기분 좋아지실 만한 곡을 하나 보냅니다. Frohe Weihnachten und guten Rutsch ins neue Jahr!
월클 Say
막연히 음악가, 예술가라고 하면 왠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곤했어요. 적어도 저에게는요. '그들의 일상은 나와 다를까?'란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음악가의 속사정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에 꾸려봤어요.
윤한결 is
월클이 첫 번째 주목한 음악가는 지휘자 윤한결입니다. 지휘자로서 윤한결은 2015년과 2017년 하이덴하임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음악 어시스턴트로 활동하였고, 2017/18 시즌 뉘른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마르쿠스 보쉬 교수의 부지휘자, 2018/19 시즌 제네바 대극장의 오프닝 프로덕션에서는 게오르그 프릿치 교수의 부지휘자로 활동했어요. 그는 독일음악협회 지휘자 포럼의 장학생이자 2019/20 시즌부터는 노이쉬트렐리츠/노이브란덴부르크의 메클렌부르크 주립극장의 제2카펠마이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9년 8월 250명이 참가한 그슈타드 메뉴힌 페스티벌 & 아카데미에서 11명의 결선 진출자 가운데 당당히 지휘 부문의 1등상인 네메 예르비 상을 거머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휘자죠.
또한, 작곡가로서 윤한결은 2019년 11월부터 부다페스트의 페테르 외트뵈시 재단의 위촉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그의 차기 작품은 향후 2년 내에 페테르 외트뵈시의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초연될 예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