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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an 13. 2021

중독, 쾌감, 때때로 변태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라이프러리

새해라고 한다. 그래봤자 인간이 정해놓은 숫자가 바뀌는 것 뿐이지만 우리는 뭔가 새로움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오래된 중독을 끊어내는 다짐이 되기도 하고, 태도나 마음의 변화에 대한 맹세가 되기도 한다. 나는 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날' 들에 대해 큰 감정이 없는, 조금 메마른 사람이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니 나도 모르게 무언가 다짐을 하게 된다. 올해의 다짐은 모바일 스크린타임을 줄이고 책을 25권 읽는 것이다. 영화도 많이 보고 싶다. 아무튼 지금은 (무려 6일째!) 열심히 실행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러한 새해 다짐은 나의 오래된 중독에 의해 비롯됐다. 귀가 솔깃하신 분들이 있을까? 술? 담배?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중독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상당히 중독에 취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무언가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중독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술도 한달에 한번 마실까 말까 하며 담배는 입에 대본적도 없다. 그 밖에 도박, 섹스, 마약 등 훨씬 더 자극적인 경로(?)들도 많겠지만 거기까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화끈한 무언가를 기대하신 분들께는 죄송하다. 뭐 인생 나중에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지금은 아무튼 커피 중독자 정도로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재미없는 나에게 극강의 짜릿함을 선사하는 바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나 컨셉, 또는 행위를 접했을 때의 흥분, 씐남, 그리고 급격히 분비되는 도파민의 맛! 캬아- 쾌감을 뇌과학으로 풀어낸 것이 도파민이라더니, 새로운 것을 접하는 뇌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강렬하다. 정확한 데이터가 있는 것은 아니나 아마 이런 나의 정서는 30대 밀레니얼에게 그다지 특이한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주말이면 장비를 챙겨 도시를 떠나 캠핑을 가거나, 성인반 발레에서 다리를 찢고, 왠지 요즘 좀 침침해 진것 같은 두 눈 사이 미간을 잔뜩 찌뿌리며 두 줄의 악보를 읽어보려 애쓰는 직장인 취미반 피아노 교실에 등록한 우리 모두는 아마도 미처 몰랐던 세상에 발을 담구는 그 낯선 느낌을 사랑하는, 약간은 변태적인 인간들인지도 모른다. 



벌써 3년째 불어권에 살면서 그 흔한 ‘쥬망딸레부’조차 자신있게 내뱉지 못하는 비루한 나에게 가장 급박한 것은 아마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겠으나 나는 언제나 즐거운 것을 선택하는 사람인지라 연말에 필라테스를 등록해 필린이가 되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며 몸을 움직이는 운동에서 오는 즐거움을 새로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절로 나는 곡소리, 덜덜 떨리는 다리와 팔, 10센치도 안되는 위치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온몸에 진하게 전달되는 고통을 느끼며 지난 30년간 숨쉬기 운동만 해온 인생을 급히 욕해보지만 선생님은 얄짤없이 기어이 두세트를 마치고야 만다. 


"어깨 힘 좀 풀어요." 

"어깨가 왜 자꾸 올라가는 거야"


20년 전 예원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테크닉 공부를 할 당시에도 들었던 말로 지금 들어도 몸서리가 처질 만큼 노이로제가 생긴 지적인데 내발로 찾아간 필라테스 선생님한테 똑 같은 말을 듣고 있다. 욕심이 나면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도, 힘들면 숨을 자꾸만 멈추는 것도… 젠장, 바이올린 할 때의 나쁜 버릇들이 이렇게 똑같이 드러나다니. 인상을 잔뜩 쓰고 부들부들 떠는 와중에 저런 생각까지 들면 못견딜 만큼 이 상황이 우스워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하고는 더욱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슨 후 느껴지는 시원함과 왠지 모를 성취감, 그리고 조금씩 내 몸을 자세히 알아가는 쾌감은 꽤나 커서, 다음 날 아침에 다리를 찢으며 스트레칭을 하는 나의 낯선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아주아주아주아주 조금씩 늘어가는 관절의 탄력이나 근육의 힘을 관찰하는 것이 참 신기해서 요즘은 꽤나 즐겁게 이 새로운 취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끙끙거리며 안되는 몸짓을 시도하는 모습은 아직도 코메디가 따로 없지만 뭐 어떤가, 나만 즐거우면 그만 아니겠는가! 사실 처음엔 이렇게 살다가 너무 빨리 죽을 것 같아 시작한 운동이지만, 이 새로운 활동이 내 생활에 예상치 못한 활력을 불어 넣어주고 있음에 틀림없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싶다. 


이번 새해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모든 이들이여, 아무쪼록 행운을 빈다! 지구 반대쪽에서 작고 소듕한 내 코어근육을 부들부들 붙들어 매며 응원하고 있겠다. 




글쓴이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9살 강아지 미소의 집사. 낭만적 이성주의자이다. 발리에서 한달 살기를 꿈꾸는 등 자연과 함께 하는 힙스터의 삶을 상상하지만 연습/연주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다. 쪼꼬렛과 커피, 그리고 일 벌리기 중독자이며 프랑스 소설을 사랑한다. 유난스러운 사람들과 재밌게 살다가 삶의 끝엔 현악 사중주를 연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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