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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Mar 10. 2021

세 가지 착각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에서 바흐를 만나다

헬렌 쉐르벡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림 작업을 잇지 못한다. 오빠 대신 늙은 어머니를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 두 남자가 찾아온다. 어두운 삶에 환희처럼 다가온 두 사람은 미술상 괴스타 스텐만과 젊은 예술가 에이나르 레우테르였다. 이 기적 같은 순간의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전주곡 B단조'이다. 원래 바흐가 '평균율 클라비어 1집'의 열 번째 곡으로 작곡한 것을 실로티가 또 다른 피아노 곡으로 편곡했는데, 반복되는 음이 조금씩 긴장을 더하는 부분이 극의 내용과 너무나도 어울린다. 짧은 곡의 전반부 전체를 사용해, 두 남자의 발걸음이 헬렌에게 가 닿는 때 호흡을 딱 멈추도록 설계했다. 음악을 어떻게 삽입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2020)은 그렇게 한 인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나를 이끈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 티저 (영화사 진진)


    

연출을 맡은 안티 조키넨은 한국에서 그리 알려진 감독이 아니다. 2011년과 2016년에 <레지던트>와 <미드와이프>가 개봉했으나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신작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의 개봉 소식에 별 기대를 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평범한 작가의 작품 세계가 갑자기 폭발하기란 힘든 법이다. 그러다 스크린과 마주하곤 나는 눈을 의심했다. 흥미로운 인물과 이야기는 물론, 미술과 음악과 촬영에 엄청난 정성을 기울인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한들 이런 상황 앞에선 겸손해져야 한다. 글의 제목에 ‘착각’이란 단어를 쓴 건 그래서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슬며시 뒤집히는 경험,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을 보다 그런 아름다운 교훈을 얻었다.     


헬렌 쉐르벡(1862-1946)


헬렌 쉐르벡이란 화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북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핀란드의 뭉크’로 불린다고 한다. 몇 가지 수식어를 들은 다음 그의 심플한 그림을 접하자, 나는 어디선가 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구글에서 한글로 헬렌 쉐르벡(Helene Schjerfbeck)이란 이름을 검색하면 이 영화와 관련된 이미지만 온통 제시된다.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인 셈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보려면 원어로 이름을 검색해야만 한다. 위에 말한 것처럼 얼핏 단순하고 수수해 보이는 그림이어서 착각을 더욱 부채질한다. 그의 그림이 지닌 깊이를 감상하려면 맑은 눈을 지녀야 한다. ‘화려한 색채, 복잡한 구도, 눈을 자극하는 풍경’이 부재하는 그의 그림은 투명한 예술혼을 숨기고 있다. 쉬 드러나고 쉬 보이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그림을 뒤늦게나마 발견했다는 기쁨이 컸다.  

   

핀란드가 요즘 인기 있는 관광지라는 말을 들었다. <카모메 식당>(2006)이 안겨준 헛된 이미지가 한몫했으리라 짐작한다. 북유럽은 보통 복지가 뛰어난 선진 국가로 알려져 있다. 불과 1세기 전 북유럽 국가들의 현실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곤 한다. 두 번째 착각이 그랬다. 피터 왓킨스의 <에드바르트 뭉크>(1974)에서 뭉크가 견뎠던 노르웨이의 빈곤과 추위는 상상을 넘어선다. 지금 뭉크가 태어난다면 그런 그림이 나오지 않을 게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여성에겐 그 현실이 더욱 끔찍했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초반 핀란드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헬렌의 그림을 전시해 번 돈은 그가 아닌 오빠에게로 입금된다. 오빠가 허용하는 경우에만 여동생에게 일부의 돈이나마 주어진다. 극 중 여성들이 동맹을 맺어 투쟁을 벌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될 지경이다.    

  

한국어 제목이 부끄럽지 않게, 영화는 헬렌이란 인물의 예술혼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미술관 촬영이다. 화가와 그림을 스크린에 담는 영화로서 미술과 촬영에 힘입어 고즈넉하고 투명한 분위기가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에는 영화의 격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고전음악, 그중에서도 피아노와 실내악 곡을 적절하게 배치해 인물의 심리를 표현한다. 모차르트, 드뷔시, 사티 등의 작곡가가 호명되는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바흐의 이름이다. 위에 언급한 바흐/실로티 '전주곡 B단조' 외에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6번을 사용했으며, 그것으로 모자라 감정을 자극하는 사랑스러운 곡 하나를 더했다. 마르첼로가 작곡한 '오보에 협주곡 D단조'의 2악장을 바흐가 '아다지오'로 편곡한 피아노 독주곡이 그것이다.



글렌 굴드 - 바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 BWV 974



헬렌은 에이나르와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감을 품는다. 함께 드라이브에 나선 동안, 그는 문득 헬렌을 별장으로 초대한다. 그때 '아다지오'가 툭 흐르기 시작하고, 헬렌이 관객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흐릿한 미소를 짓는다. 미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 음악이 흐르는 시퀀스 전체에 걸쳐 그는 대여섯 번 넘게 계속 미소를 보낸다. 알다시피 '아다지오'는 기쁨보다 슬픔의 정조에 더 가까운 곡이다. 얄궂게도 영화는 헬렌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아다지오'를 삽입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예고한다. 그 의도를 예감했기 때문인지 나는 '아다지오'가 나오자마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바보처럼 “이 음악이 뭐지?”라고 속으로 질문했다.     


어떤 음악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오히려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르첼로/바흐의 '아다지오'도 그런 경우다. '아다지오'를 듣는 내내, 나는 클래시컬 뮤직 사이로 끼어든 이 감상적인 현대음악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다 크레디트에서 바흐와 마르첼로의 이름을 보고 머쓱함을 느꼈다. 나는 음악을 얘기할 때면 자랑하듯이 바흐의 이름을 꺼낸다. 친한 지인들은 “바흐의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라는 말을 한두 번 정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흐가 편곡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현대의 연주곡으로 오인할 줄이야! 시대의 영향 아래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삶을 산 헬렌과, 그의 삶을 기록한 영화는 오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내게 전한다. 바흐를 경유해 겸손을 깨닫는 시간, 역시 바흐는 내 삶의 빛과 같은 존재다.          




글쓴이 이용철 (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직장을 나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된 현실을 겪으며 내 결정을 후회한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게 힘을 준 것은 인간과 영화와 음악이었다. 팝과 록을 지나 몇 년 전부터 바흐에 도달해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진리는 바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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