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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Mar 24. 2021

평범함 속에 깃든 비범함

<소년 아메드>에서 슈베르트를 듣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2019년, 칸은 다르덴 형제에게 또 한 번의 상을 안겨주었다. 봉준호의 수상이 워낙 놀라웠던 차에 다르덴의 수상은 묻힌 감이 없지 않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또 다르덴인가’라고 푸념했다. 다르덴 형제는 두 번에 걸쳐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그 외에도 심사위원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각본상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9년 칸에는 새롭게 주목받은 감독들이 많았다. <애틀란틱스>의 마티 디옵, <레 미제라블>의 래드 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 등이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중, 감독상 수상자로 난데없이 다르덴 형제가 호명되었다. ‘굳이, 왜’라는 생각은 나중에 영화를 보자 ‘역시!’라는 감탄사로 바뀌었다. 세상이 갈라져 다투고 있는 세기에 그들은 단순한 말씀 아래로 지혜와 위대함을 숨긴 그런 영화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는 이슬람교도가 되고 싶은 소년의 이야기다. 게임을 즐기며 평범하게 살던 소년은 인터넷과 종교적 접촉을 통해 이슬람교를 깊이 믿기로 결심한다. 너무 교리에 딱딱하게 집착한 탓일까. 소년은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및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겨움을 겪게 된다. <소년 아메드>는 이런 소재를 다루는 서구 영화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보통 종교적 문제를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으며, 인물이 잘못된 길에서 어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동안 젊은이와 소년 소녀에 관한 영화를 계속 만들어온 다르덴 형제는 특유의 노선을 견지한다. 그들은 인물이 설령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잘못을 쉽사리 단죄하지 않는다. 아메드가 돌봄 학교의 선생에게 상해를 가했음에도 그를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아이의 행동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전달된다. 그게 다르덴의 영화다.


<소년 아메드>(2019)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여타 영화들이 즐겨 쓰는 게 '음악'인데, 놀랍게도 다르덴 형제는 극에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음악은 관객의 정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그런 인위적인 반응을 원하지 않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첫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로제타> 이후 영화 작업에서 음악감독을 고용한 적이 없다. 극히 제한적으로 음악을 사용하기에 그 정도는 형제들이 직접 선택하는 것 같다. <소년 아메드>에는 두 개의 곡이 사용되었다. 소년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록 음악,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흐르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 내림나장조, D. 960'이다.


<소년 아메드>는 건물에서 추락한 아메드가 땅에 누운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소년이 끝내 살아남기를 소원하지만, 영화는 야속하게 그 장면에서 암전 된다. 슈베르트의 21번 소나타가 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지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슈베르트는 서른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기 2개월 전에 작곡한 것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21번이다. 즉, 이 곡은 슈베르트가 세상에 남긴 작별 인사나 다름없다. 이렇게 말하면 소년의 죽음을 암시한 게 아니냐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용서를 구하는 소년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기 위해 이 음악을 사용한 게 아닌가 싶다. 슈베르트의 선율적인 특성이 잘 살아있는 소나타 21번, 그중에서도 슬픔과 아름다움의 정조가 뛰어난 2악장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나고, 소년의 마지막 숨결을 대하는 내 안타까운 마음도 위안을 얻는다.



 

이 곡은 워낙 유명한 음악이어서 명연주가 적지 않다. 몇 년 전에 이 음악을 녹음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녹음에 앞서 ‘거대한 용기’가 필요했던 작업이라고 말했다. 960번은 그런 음악이다. 이 음악의 가장 유명한 음반은 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가 1972년에 녹음한 것이다. 그는 1972년에만 두 개의 뛰어난 음반을 남겼을 정도로 이 곡을 사랑한 피아니스트인데, 느리고 느린 손길로 음악의 끝을 향하는 연주가 기막히다. 그 외에 빌헬름 켐프나 라두 루푸 같은 슈베르트 전문가는 물론, 요즘 주목받는 그리고리 소콜로프나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에 이르는 수많은 연주자가 혼신의 연주를 남겼다. 여러 이름을 굳이 열거하는 이유는 다르덴 형제가 선택한 녹음이 알프레드 브렌델의 1988년 연주인 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크레디트에는 1989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브렌델은 연전에 은퇴할 때까지 주로 필립스 음반사에서 녹음을 남긴 피아니스트다. 많은 녹음을 남겼으나 음악의 스펙트럼이 넓다기보다 몇몇 작곡가에 주력했다는 인상을 준다. 소나타 전곡 녹음을 여러 번에 걸쳐 마친 베토벤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면, 그는 내가 좋아하는 바흐의 건반 음악은 거의 녹음하지 않았다(*그런 점에서 마우리치오 폴리니나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비슷하다. 왜 그럴까). 그가 베토벤 다음으로 주력했던 음악가 가운데 슈베르트를 빼놓을 수 없으며, 그중에서도 21번 소나타를 가장 많이 녹음했다. 오죽 좋아했으면 2008년에 가진 고별 연주회의 연주곡 중 하나도 21번 소나타였다. 나는 그가 1971년에 녹음한 것에 더 끌리지만, 다르덴 형제는 위에 언급한 1988년의 디지털 녹음을 택했다.



알프레드 브렌델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내림나장조 D. 960



슈베르트 전문가인 브렌델의 연주를 선택한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이 연주에 대한 평가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인 게 사실이다. 열거했던 음반을 비롯한 유명 연주들의 개성과 비교해 브렌델의 연주는 교과서적이라는 평을 듣는 편이다. 좋게 말해 규범적이지만 심심한 연주로도 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다르덴 형제가 브렌델을 선택한 이유를 거기에서 찾는다. 그들이 슈베르트의 21번 소나타를 삽입한 마음을 떠올려 보면, 거장의 실력을 과시하는 연주나 개성이 넘치는 류의 것보다는 정석에 가까운 성실한 연주가 더 어울린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다르덴 영화의 성격도 그러하다. 처음 그들의 영화를 보면 느리고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들의 영화 속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눈이 필요하다. 슈베르트와 만난 브렌델이 평범함 속에 새겨둔 비범함,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것을 다시 깨닫게 한다. 




글쓴이 이용철 (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직장을 나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된 현실을 겪으며 내 결정을 후회한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게 힘을 준 것은 인간과 영화와 음악이었다. 팝과 록을 지나 몇 년 전부터 바흐에 도달해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진리는 바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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