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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Mar 24. 2021

영원히 순수한 부를레스케 AV. 85

팀파니스트 김한규의 라이프러리

I'm_나라는 사람



73년생 김한규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성가대, 교내 합창단 활동도 했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추천으로 성악 레슨을 받게 되었어요. 이전까지 제게 노래는 편하고 즐거운 놀이였는데, 공부가 되니 마음껏 유희할 수 없었죠. 노래를 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더라고요. 이렇게 노래를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제 주변에는 음악이 있었고, 저 또한 음악 주변을 맴돌았죠. 마침 교회의 지휘자님이 제게 타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인문계 고등학교 예체능 반에서 타악 전공자는 제가 유일했어요. 학교에서 예체능 전공생들을 위해 간간이 수업을 빼주긴 했지만, 체계적인 시스템 같은 것은 없었으니 전부 알아서 해야 했죠. 


그렇게 입시를 준비해서 대학에 진학했어요. 대학생 때 꿈은 선생님이었어요. 교생 실습까지 나갔는데, 직접 현장을 겪어 보니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하나 봐요. 뒤늦게 유악을 준비하며 어디로 갈까 하다가 지극히 단순한 생각으로 '클래식이니까 독일에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했죠. 유명한 작곡가나 음악가는 대부분 독일인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낙천적이고 아주 단순해요. 




팀파니스트 김한규

독일에서 가장 많이 느꼈던 건 '자연스러움'이에요.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음악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곡을 익히고 연주법을 습득하려는 노력도 물론 하지만, 내가 연주해야 하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아요. 교육 커리큘럼도 화성학이나 청음이 큰 비중으로 포함되어 있어요. 그곳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듣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더라고요. 창작이나 작곡을 하지 않더라도 악기 연주자들도 자기 음악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 아니라요. 테크닉적인 부분도 배웠지만, 그들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삶의 양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죠. 그들의 건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독일의 건축물은 단순하고 투박해요. 하지만 멀리서 넓은 시야로 봤을 때는 담백하면서도 웅장한 멋이 있죠. 사람들도 의사 표현이나 자기감정에 솔직해요. 그들이 어떤 문화 속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그런 음악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고민했던 것 같아요.


원래 제 성격은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스타일이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음악을 할 때는 달라져야만 했어요. 팀파니는 저음을 담당하는 동시에 비트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역할도 해야 하거든요. 물리적인 포지션은 맨 뒤에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맨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어요. 리더십과 결단력, 판단력이 중요하죠.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는 철저함도 생겼어요. 옷을 사러 가도 가능하면 한 번 들어간 가게에서 사고, 실밥이 튀어나와 있어도 그냥 입는 편인데 음악에서만큼은 까다롭게 굴고 세세하게 따지는 편이에요. 필요에 따라 자기를 가공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독일 유학 시절




Music_음악적 취향 



73년생 김한규

평소에는 팀파니가 안 들어간 음악을 듣죠. 일한다는 생각이 안 드는 음악을 들어야 마음 편히 쉴 수 있거든요. 슈만의 피아노 콰르텟이나 슈베르트의 가곡,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도 좋아해요. 8090 가요도 좋아하고, 재즈도 좋아해요. 한 때 재즈 드러머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거든요.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에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 음악에 지쳐있는 경우가 많아요. 음악으로 힘들 줄은 아는데, 기대어 쉬지는 못하는 거죠. 음악가들에겐 음악이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주는 존재여야 해요. 나를 울게도 하지만 웃게도 하고, 긴장하게도 하지만 완전히 풀어지게도 해야 하죠. 자기만의 휴식처가 되는 곡을 정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자끄 루시에 트리오 'Play Bach'



팀파니스트 김한규

독일에서 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 가죽 재킷에 쇠사슬이 달린 옷을 입은 콧수염 난 아저씨가 앉아있었어요. '저 사람은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 영상 속에서 그 아저씨가 팀파니를 치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저희 학교 교수시더라고요. 그렇게 라이너 제거스(Rainer Seegers) 선생님을 만나면서 팀파니를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팀파니 연주에 있어 멘토이자 롤 모델이죠. 팀파니스트로 좋아하는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부를레스케'예요. '부를레스케(Burleske)'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광대극'이라는 뜻인데, 이 곡은 특이하게도 팀파니의 솔로 멜로디 테마로 시작돼요. 제목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이 중심에는 피아노와 대화하고 오케스트라와 호흡하는 팀파니가 있어요. 화성을 밑에서 받쳐주는 역할이 아니라 맨 앞으로 나와 있는 느낌이죠. 실제로도 피아노 가까이 팀파니를 두고 이 곡을 연주하기도 해요. 저도 한국에서 딱 한 번 연주해봤을 정도로 많이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한 번쯤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슈트라우스 '부를레스케' 피아노 아르헤리치 팀파니 라이너 제거스




Outlook_ 세계관


팀파니스트 김한규

"음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 앞에 저는 '순수함'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좋은 관계도 언젠가는 깨질 수 있고 세상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음악은 달라요. 내가 주는 만큼 그대로 돌오아죠. 음악에는 거짓이 없어요. 특히 음악가에게는 더 솔직하죠. 내가 쏟아부은 에너지만큼 내게 돌려줘요. 예술의 특성상 처음에는 당연히 재능이 크게 작용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노력의 비중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음악가는 음악 앞에서 어린아이 같아야 해요. 순수함과 더불어 늘 도전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편한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지금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더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요. 최근에 개인적으로 새 팀파니를 마련했어요. 요즘 나오는 팀파니는 페달로 밟는 형태인데, 옛날에는 핸들로 조절했거든요. 새로 들인 팀파니는 1957년 만들어진 악기로 요즘 만들어진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음색이 있어요. 울림통이 작고 소가죽피를 써서 소리가 간결하고 명확해서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초기작까지 고전 음악에 멋지게 어울리는 색을 가졌죠. 얼마 전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 팀파니를 사용했어요.


좌) 머신팀파니(소가죽피를 사용하며 핸들로 음정을 조절한다)  우) 페달팀파니(플라스틱피를 사용하며 페달로 음정을 조절한다)


코리안심포니 단원 김한규

독일 유학을 마치고 2003년에 귀국해 유라시안 필하모닉에 1년 반 정도 있었어요. 그리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시험을 봤는데 똑! 떨어졌어요. 그리고 다음 해(2006년)에 다시 도전해 입단할 수 있었죠.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네요. 처음 오케스트라 입단을 결정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타성에 젖은 연주자가 되지 않을까"에 관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공연 전날엔 설레요. 때때로 열심히 준비한 내일의 무대를 기대하며 잠 못 이루는 밤도 있죠. 모든 연주자가 그렇지만 특히 팀파니 연주자는 늘 연습전부터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요. 음악 앞에서만큼은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아요. 한결같음. 더 나이가 들어 머리가 온통 하얗게 물든 60대 노인이 되어도 계속 이런 마음이길 바라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코리안심포니 단원 김한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장르를 연주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좋은 판단력과 빠른 적응력이 필요해요. 오케스트라 연주자는 솔리스트에 비해 개인의 자유는 덜하겠지만 함께 노래한다는 묘미가 있어요. 여태까지 수많은 무대를 해오면서 기분 좋은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죠. 가장 좋은 순간은 지금 함께 이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마음인 게 느껴질 때입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낄 때의 감동과 전율이 있어요. 어떤 공연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연주할 때였어요. 어느 순간 하나로 만들어지는 울림, 감동이 느껴졌죠. 무대를 마치고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더라고요. '하모니'의 사전적 의미 중 '미적 대상의 부분들이 모순 없이 통일 관계를 맺어 쾌감을 낳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단순한 음악적 법칙이나 화음의 연결을 넘어 모두의 마음이 모순 없이 통일된 관계를 맺는 것, 그게 진짜 하모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확성이나 테크닉도 중요하고, 서로의 성향이나 생각이 안 맞을 수도 있지만 한 무대 위에서 함께 연주할 때만큼은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프로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죠. 우리가 무대 위에 써 내려가는 '하모니'라는 드라마가 관객분들에게도 드라마틱한 순간을 선사하리라 믿어요.



팀파니스트 김한규

팀파니스트로서 아쉬운 무대도 당연히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정말 많죠. 영상으로 지난 공연을 모니터링할 때면 예민하게 부족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도취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은 음악가에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대에서 아찔했던 순간들도 정말 많아요. 한 번은 연주하다가 스틱이 날아간 거예요. 제가 트레몰로로 끝내야 하는 순간에 스틱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고…. 옆에 있던 스틱을 급히 가져다가 마무리한 기억이 있어요. 다시 생각해도 진땀이 나는 것 같아요.


또 타악 연주자로서 '기다림의 시간'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죠. 한 시간 남짓한 프로그램 동안 딱 두 번 치고 끝나는 때도 있어요. 농담으로 현악기, 관악기들이 십 원, 이십 원할 때 타악은 오만 원, 십만 원 한다고 할 정도죠. 하지만 그 한 번을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긴장하고 있죠. 40분을 기다렸는데 만회할 기회조차 없는 짧은 연주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딱하게 봐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공격 플레이가 좋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된 팀이라도 그 골키퍼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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