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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Apr 08. 2021

델리카티시모:클라리넷 협주곡 Op.115

클라리네티스트 박시내의 라이프러리

I'm_나라는 사람



86년생 박시내 

저의 유년시절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마도 '자유'일 거예요. 워낙 활발한 성격이라서 소녀, 공주, 소꿉놀이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죠. 팔이나 무릎에 상처 딱지를 달고 살았어요. 다치는 게 무섭지 않을 만큼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리는 게 좋았어요. 방학에는 주로 할머니 댁에서 사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염소나 닭에게 밥을 주고, 고추나 수박을 따는 일을 돕기도 하고, 사촌들과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를 날리며 신나게 뛰어놀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풍경과 냄새, 자유로움이 제 감수성에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음악에 관심이 많으셨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들으며 자랐어요. 여유로운 주말에는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곡에 맞춰 막춤을 추거나 지휘를 흉내 내던 장난기 가득한 아이였어요. 집에는 부모님이 모아두신 LP가 많았어요. 수많은 음반 앞에서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을지 직접 선곡하며 즐거웠던 기억이 나요.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음악 자체가 제겐 큰 즐거움이었어요. 






클라리네티스트 박시내 

중학교 1학년 때 리코더 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제가 악기를 좋아하는 걸 보고 음악 선생님이 클라리넷을 추천해주셨어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레슨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시면 항상 다음 것까지 연습하며 다음 주 레슨 시간을 즐겁게 기다렸어요. 그렇게 악기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예고 진학을 생각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클라리네스트의 꿈을 갖게 되었어요. 

예고 입시를 준비하면서는 늦었다는 생각에 강박감이 있었어요. 계원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매일 연습에 몰두했어요.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꽤 멀었는데 첫차를 타고 등교해서 학교 연습실 문이 닫힐 때까지 연습하다 집에 갔어요. 

제 꿈은 계속 악기 연주를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오케스트라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 제 선생님이 KBS교향악단의 연주자로 계셨는데, 그 많은 소리 중에 제게는 클라리넷 소리가 귀에 꽂히더라고요. 마치 군중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한눈에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Music_ 개인적 취향



86년생 박시내 

사실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을 지겹도록(?) 듣기도 했고, 클래식을 들을 때는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정말 휴식이 필요할 때는 클래식과 거리가 아주 먼 음악을 들어요.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좋아해요. 내 돈을 내고 노래방에 간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요. 저는 안타깝게도 '고음 불가'거든요. 제가 누군가와 노래방을 간다는 건 정말 친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최근 자주 듣는 곡은 폴킴의 '커피 한잔 할래요'인데, 요즘 같은 화창한 봄날에 잘 어울리는 곡이에요. 저는 뭐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하는 스타일이라서 좋아하는 곡이 생기면 온종일 무한 반복하며 듣기도 해요. 

취미생활도 한 번 빠지면 질리도록 열심히 해요. 삼십 대 초반까지는 사이클을 탔어요. 철인 3종 경기에 나가는 게 목표였지만, 사고로 팔을 다치면서 그만두었어요. 어릴 때는 다치는 게 두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악기 연주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더라고요. 그렇다고 요가나 자수 같은 정적인 활동은 저랑 안 맞아요. 작년에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우연히 집 앞에서 주말농장 광고를 보고 텃밭을 분양받았어요. 어린 시절 농사 경험(?)이 있어서인지 제게 귀농의 꿈이 잠재되어 있거든요. 요즘 이것저것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어요.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그만큼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에요. 조금만 소홀해도 시들시들해지는 게 악기와 비슷해요. 제게 1순위는 당연히 악기와 연주이지만, 충분한 휴식과 인생을 즐기는 방식은 한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클라리네티스트 박시내 

제가 생각하는 클라리넷의 매력은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밝고 경쾌한 소리부터 서정적이고 진지한 저음까지 음역의 폭이 넓고 강약의 조절도 섬세하게 가능해요. 그래서 감정이나 느낌을 섬세하게 연출할 수 있는 표현의 스펙트럼이 넓은 악기예요. 그래서 클래식뿐 아니라 재즈, 대중음악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도 많이 사용되죠. 클라리넷은 고음역의 Eb클라리넷이나 알토 클라리넷, 저음역의 바셋 호른, 베이스 클라리넷 등 악기 자체에 종류가 많아요. 저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맡고 있는데, 한 연주자가 여러 악기를 다 잘 다루는 일은 흔하지 않아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수석 클라리네티스트 니콜라 발데루(Nicolas Baldeyrou)는 베이스 클라리넷도 정말 잘 불어요. 언제나 즐겁게 연주하는 모습이나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는 모습도 보기 좋고요. 특히 혼자서 1인 N역을 소화하는 연주는 거의 서커스에 가까울 정도죠. 



Nicolas Baldeyrou - Rachmaninov, Musical Moment No.4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Brahms, 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115)'입니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실내악 연주를 하기도 했던 추억이 많은 곡이기도 하고, 제가 힘들거나 우울할 때 듣고 위로를 받는 곡이에요. 1악장은 바이올린 두 대로 시작하는데, 그 멜로디부터 브람스만의 서정적인 매력을 잘 느낄 수 있어요. 이 곡은 브람스가 절필을 선언한 후 클라리네티스트 리하르트 뮐펠트(Richard Muhlfeld)를 알게 되면서 영감을 얻어 클라리넷 3중주를 완성한 후 이어서 쓴 작품으로 알려졌어요. 만디체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중 '앞서 만들었던 3중주 곡과 쌍을 이루는 큰 규모의 실내악 곡'을 쓰고 있다고 밝혔죠. 그의 말처럼 실내악 곡이지만, 마치 교향곡과 같은 풍성한 감정이 담겨있어요. 이 곡의 초연에는 브람스의 특별 초청으로 뮐펠트가 클라리넷을, 하우스만이 첼로를 연주했어요. 당시 뮐펠트가 사용하던 클라리넷은 피치가 조금 높은 편이었는데 브람스가 뮐펠트와 앙상블을 하기 위해 피아노를 기꺼이 조율했다고 해요. 그가 클라리넷의 소리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죠. 브람스가 저를 위해 만든 곡은 아니지만, 클라리넷 연주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곡이에요. 



Damien Bachmann & Quatuor Ébène - Brahms, 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115




#Outlook_ 세계관



클라리네티스트 박시내 

음악을 한다는 건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어두운 터널 끝에서 마주하는 빛은 더 눈부신 법이니까요.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눈 녹듯 사라지거든요. 저는 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항상 남들보다 더 연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저 자신을 채찍질해왔던 것 같아요. 입시생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연습하려고 해요. 그래서 집에 아예 방음 연습실을 만들었어요. 종일 연습실에서 보내는 날도 있고, 보통 세 시간 이상은 연습에 몰두해요. 원래 저는 엉덩이를 붙이고 하는 일보다 액티브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없던 집중력과 끈기가 생겨요. 특히 연주자로서는 조금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때는 해결될 때까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편이에요. 연습을 충분히 해야 마음이 편해요. 

호흡과 소리는 여전히 제게 노력을 요구하는 부분이에요. 관악기 특성상 호흡이 중요하고, 특히 클라리넷은 소리가 섬세한 악기라서 미세한 부분들까지 예민하게 신경 써야 해요. 인생에서든 연주에서든 부족함을 느끼는 건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부족한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자기의 몫이죠.



코리안심포니 단원 박시내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대부분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저도 가야 하나 싶었죠. 하지만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케스트라 단원을 꿈꿔왔기 때문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 시험을 봤어요. 합격하면 고민이 사라질 것 같아서 큰 부담이나 기대 없이 시험에 임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마음껏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경쟁률이 60:1 정도라고 들었는데, 제가 입단할 때만 해도 그렇게 경쟁자가 많지 않았어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유학을 다녀온 후 성장한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던 적은 있지만, 어디에서든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배움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여기서 충분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느껴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는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가장 우선은 저희의 공연을 봐주시는 관객들을 위한 배려이고, 두 번째는 단원들 간의 배려예요. 각자 음색도 다르고 취향도 있지만, 오케스트라에서는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며 타협하고 호흡을 맞춰야 좋은 앙상블이 나오는 것 같아요.  다시말해 함께 만드는 소리가 얼마나 블렌딩이 잘 되느냐가 중요하죠. 호흡이 잘 맞았을 때 관객들도 듣기 편하고, 연주자들도 행복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클라리네티스트 박시내 

작년 코로나19로 모든 활동이 취소되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코리안심포니 스트링 단원들과 실내악 공연을 할 기회가 생겼고, 비대면 생중계 공연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포맷을 경험하게 되었죠.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후 솔리스트로서의 무대가 많지 않아 부담감도 있었지만, 연주할 수 있는 무대가 소중했던 때라 고민하지 않고 참여했어요. 그날 연주한 곡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Clarinet Quintet in A major k.581)'였어요.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작품 중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이면서 마지막으로 작곡한 협주곡이죠. 이 곡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빈 궁정 오케스트라의 클리네티스트였던 슈타틀러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클라리넷 레퍼토리의 대표곡인 만큼 클라리넷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값진 경험이었어요. 슈타틀러는 당대 최고의 클라리네티스트로 알려졌기도 하고, '천상의 선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곡이라 더 좋은 소리로 표현하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연습했어요. 오랜만에 연주자들과 직접 곡에 대해 고민하고 완성하는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아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내 손안의 콘서트 V' (24:16부터)



코리안심포니 단원 박시내 

무대 위에서의 실수는 셀 수 없이 많죠. 객석에서는 전체 소리가 블렌딩되어 들리니까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정말 미세한 실수도 저희끼리는 알죠. 누군가 실수하는 걸 듣고 움찔하기도 하고, 동시에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애써 모른 척 하기도 해요. 한 번은 오페라 연주를 하는데 쩍 소리가 나면서 관에 크랙(금)이 간 적이 있어요. 목관악기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날 날씨가 정말 추웠거든요. 다행히 곡의 끝 부분이었고 악기가 잘 버텨줘서 무사히 무대를 마쳤는데, 말 그대로 심쿵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무대에 설 때는 동료들이 큰 의지가 돼요. 함께 만드는 앙상블에 집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곡에 스며들어 긴장감을 잊을 수 있거든요. 옆 사람의 에너지가 전이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연주하면서 음악을 감상하게 될 때가 있어요. 사실 연주할 때는 연주에 몰입해서 감상이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감상자가 되는 특별한 순간들이 존재해요. 2019년에 했던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3막에서 카라바도시의 솔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연주할 때가 딱 그랬어요. 이 외에도 잊지 못할 순간들이 많죠.

벌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지 14년이 지났어요. 여전히 무대는 제게 긴장감을 선사해요.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특수 악기의 솔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7번 2악장이나 8번 5악장,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에 있는 베이스 클라리넷 솔로를 연주할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 상태예요. 그래서 제가 저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요.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긴장을 기분 좋은 설렘으로 바꿀 수 있거든요. 최근 들어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는 무대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아요. 가득 찬 객석, 관객들의 표정, 그리고 박수와 환호 소리…. 그리운 것들이 많아요. 그래도 곧 좋은 날이 올 거라 믿어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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