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에서 에이나우디를 만나다
요즘에야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학교와 기관이 흔하지만, 영화의 역사가 시작될 즈음에는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그 당시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 중에서 영화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 예술로 평가하지 않은 건 예사고, 단순한 기술 정도로 파악한 것이다. 당연히 그걸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현대음악가로 지칭될 정도는 아니어도 적어도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작곡에 익숙한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 가운데는 영화의 역사와 함께 거장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클래시컬 음악가로 인정받기도 했다. 물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처럼 고전음악의 작곡가였다가 일찌감치 영화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위대한 스코어를 만들어낸 창작자도 없지 않았다.
영화가 고전기를 지나 모던의 시기로 진입하면서 고전음악과 영화음악을 병행한 위대한 작곡가로는 아르보 패르트와 필립 글래스, 마이클 나이먼이 인상적인 성과를 남겼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종종 사용된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은 낯익은 고전이 된 지 오래이며, 글래스의 '디 아워스'나 나이먼의 '피아노' 사운드트랙은 대중적인 환호를 얻어냈다. 존 애덤스가 의외로 영화 작업에 열정적이지 않은 요즘, 현대음악 작곡가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영화음악 창작자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막스 리히터, 올라퍼 아르날즈일 것이다. 리히터의 '온 더 네이처 오브 데이라이트'는 거의 '거울 속의 거울'처럼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아르날즈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나는 그들 중 에이나우디의 '나날들(I Giorni)'를 사랑한다. 특히 다니엘 호프가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해 연주한 것은 (노래의 제목에 맞게) 일상의 나날을 보내면서 들을 때마다 문득 감동하곤 한다. 두 버전을 모두 들어보길 추천한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칼럼의 음악으로 에이나우디를 선택한 이유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8편의 영화 중 무려 2편의 영화가 그의 음악을 중요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력한 작품상 후보인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2020)는 정확하게 말해 에이나우디가 음악을 맡았다기보다 그의 음악을 가져다 쓴 것에 가깝다. 에이나우디가 근래 주력했던 <세븐 데이즈 워킹> 연작에서 몇몇 곡을 가져온 것. 그러나 <더 파더>의 경우는 다르다. 에이나우디의 음악을 사용한 점에선 다르지 않으나 <더 파더>에선 에이나우디가 작곡가로서 전체 음악에 관여했다. 이 말만 들으면 에이나우디가 자기 음악으로 영화 전체를 채웠을 것으로 보이겠으나, 그는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존경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자기 음악을 사용하는 한편으로 극과 인물에게 맞게 다른 음악을 적절하게 섞는 묘를 발휘했다.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에서 수상이 유력한 <더 파더>는 안소니 홉킨스의 영화다. 프랑스인 플로리안 젤러가 쓴 희곡을 영화화한 것인데, 젤러가 또 다른 위대한 작가 크리스토퍼 햄튼을 데려와 굳이 영어로 각색한 건 홉킨스에게 역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이 시대의 위대한 배우인 홉킨스는 이 영화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을 연기한다. 이미 <양들의 침묵>(1991)으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지적인 정통 연기의 대가로 불린다. 그런 그가 치매에 걸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노인 역을 연기하는 것은 곱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터, 그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연기할 때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과연 대가답게 위기의 노인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영화가 점점 심심해지는 시간에 이런 연기를 본다는 게 축복이 아니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에이나우디가 디자인한 음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인물의 내면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지만, 오페라의 아리아를 이용해 직접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을 쓰기도 한다. 영화는 헨리 퍼셀이 작곡한 장중한 바로크 음악으로 문을 연다. <킹 아서>의 3막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당신의 어떤 권력이?’가 안드레아스 숄의 목소리와 함께 흐르는데, 이후 육신의 고통을 한탄하는(혹은 푸념하는) 노인의 심정을 미리 예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베이스 목소리로 익숙한 곡을 카운터테너의 목소리로 듣노라니 기분이 색다르다. 점층적으로 음을 쌓아 올리는 스타일이 인물의 운명에 다가서는 느낌을 주어 영화의 도입부 음악으로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장면이 바뀌면 노인이 헤드폰으로 이 음악을 듣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노인은 지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화에는 두 개의 아리아가 더 나온다. 노인이 혼자 있을 때 흘러나오는 ‘카스타 디바’와 딸의 주제가처럼 사용된 ‘귀에 남은 그대의 음성’이 그것이다. 빈센조 벨리니의 <노르마> 1막에 나오는 ‘카스타 디바’는 이 곡의 소유자에 가까운 마리아 칼라스의 버전을 삽입했고, 조르쥬 비제의 <진주조개잡이>의 아리아는 시릴 뒤부아의 중성적인 목소리 버전을 사용했다. 인물이 갈망하는 평화의 염원이나 옛 추억 등에 맞춰 선곡한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내용보다 곡이 주는 어떤 정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선택한 게 아닌가 싶다. 특히 비제의 아리아는 두 번 삽입되면서 딸의 슬픈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는다. 즐겨 듣던 아리아는 아니었으나 이번 영화를 보면서 끌리게 됐다.
노인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심리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삽입되었던 <세븐 데이즈 워킹>의 곡들이다. ‘차가운 바람’과 ‘낮은 안개’의 변주곡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앙상블로 연주된 곡으로 인물이 느끼는 불안과 통증, 그리고 슬픔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에이나우디는 미니멀리즘의 음악가로 불린다. 그동안 나는 미니멀 음악이라고 하면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 같은 건조한 스타일을 주로 떠올려 왔다. 반면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서정적이다. 이게 과연 미니멀 음악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언젠가 리히터, 에이나우디, 아르날즈의 음악이 너무 서정적이어서 대중음악과 무슨 차별화가 될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더 파더>를 통해 에이나우디와 다시 만나면서 그런 구분이 중요할까 싶어졌다. 기계의 소음에서도 리듬과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음악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글 이용철(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직장을 나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된 현실을 겪으며 내 결정을 후회한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게 힘을 준 것은 인간과 영화와 음악이었다. 팝과 록을 지나 몇 년 전부터 바흐에 도달해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예측 불가능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진리는 바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