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베르크와 할리우드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2005)의 결말부, 주인공 레이(톰 크루즈)는 딸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외계 생명체의 침공으로부터 힘겹게 살아남는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자 그는 딸을 안고 자랑스레 보스턴에 있는 전처의 집에 당도한다. 마침내 재회한 가족을 보며 안도감을 내쉴 수 있으리라 예상한 관객에게 기묘하게도 스산하고 불안한 사운드트랙이 들려온다. 'The Reunion(재회)'라는 제목의 이 트랙은 현악기와 피아노 솔로가 각각 음역대를 옮기며 불협화음을 만드는데 그에 따라 관객은 관습적인 해피엔딩을 보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불온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윽고 레이가 집에서 뛰쳐나온 아들과 포옹하는 순간 마침내 현악기와 피아노 파트는 하모니를 이루며 드디어 사건이 그리고 영화가 끝났다는 안도감을 준다. 이처럼 불협화음을 통해 긴장을 야기하는 음악의 사례는 이제 할리우드의 수많은 메인스트림 영화들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대다수의 경우 이는 하나의 음을 베이스로 부분적으로 이미지에 공간감을 부여하거나 음악의 리듬이나 템포를 이미지의 속도와 맞추며 역동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데 활용되고는 한다. 그와 달리 상기한 <우주전쟁>에서는 정형화된 내러티브의 결말과는 다소 이질적인 스코어가 병치됨으로써 음악이 명시적으로 말해진 내러티브와는 다소 다르게 기능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우리가 어린 시절 배운 대로 다장조의 으뜸음은 도이다. 그리고 이 으뜸음을 중심으로 멜로디가 종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구성된 음의 체계를 일컬어 우리는 조성이라 부른다. <우주전쟁>에서는 조성이 둘 이상으로 구성된 복합조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관습적인 장르 영화의 규칙 안에서는 포함될 수 없는 무언가 다른 요소를 넌지시 가리킨다. 대개 하나의 조성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내러티브를 보조하는 장치로 기능함으로써 영화의 주제를 위한 매개가 된다면 이러한 복합조성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내러티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 이때 음악은 자율화된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우리가 대중문화 안에서 길들여진 상투적인 연상에 기대어 순전히 불안, 긴장, 공포와 같은 주관적 감정을 지시하는 요소로 환원된다.
이제 우리는 다조성 음악에서도, 아니 심지어 조성이 없는 무조음악일지라도 그를 특별히 낯설게 여기거나 거북하게 느끼지만은 않는다. 조성이 없는 음악은 없는 대로 특정한 감정이나 분위기를 지시하는 기호이자 양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협화음의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것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다른 한편 그러한 음악은 다소 짧은 스코어로 변용되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예능 프로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 일상의 도처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여러 TV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콘텐츠의 효과음으로 자주 듣게 되는 <싸이코>(1960)의 메인 테마 'The Murder'의 바이올린 전주는 특정한 멜로디 없이 무조성 음악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를 공포에 대한 정형으로 즉각 받아들인다. <셔터 아일랜드>(2010)의 초반부 주인공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외딴섬의 정신병원에 도착하는 장면에서는 무조성적인 음악과 후기 낭만주의적인 멜로디가 혼합된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3번 4악장의 '파사칼리아'가 흐르며 불안하고 긴장 가득한 분위기와 함께 공간을 괴기스럽게 보여준다.
이런 흐름에서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근간이 되는 음악을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진 현대음악, 그중에서도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전복적인 족적을 남긴 쇤베르크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실히 쇤베르크와 할리우드라는 키워드는 함께 붙여놓기엔 지극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물론 쇤베르크는 실제로 1930년대에 유태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후로 MGM과 같은 할리우드 제작사와 영화음악 작곡을 위해 교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가 작곡한 음악이 직접적으로 영화음악으로 사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음악사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쇤베르크는 조성적 화성과 같은 위계구조적 기능에서 벗어나 모든 음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 불협화음을 해방시켰으며 이는 무조음악 나아가 한 옥타브 내의 12개의 반음에 특정한 규칙을 부여한 12음 기법으로 나타나고 발전하게 된다. 이후 음의 높이뿐 아니라 음색이나 템포, 음의 길이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게 체계화한 음렬주의나 연주 현장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규정한 우연성 음악과 같은 아방가르드 음악 또한 그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거대한 규모의 산업 하에 있는 할리우드 영화는 장르, 스타와 같이 당대의 관객과 사회적인 합의를 전제로 한 규격화된 시스템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상과 대중의 의식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변화를 요구하고 표현한 쇤베르크와 대중들이 변화에 동요하지 않게 적응시킨 할리우드 영화는 누가 보아도 완전히 서로 대립되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쇤베르크는 <5개의 관현악 소품(Five Pieces for Orchestra, Op.16)>(1909)에서 회화를 빌려와 일련의 색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고안했다. 그는 음색의 진행만으로 멜로디의 흐름 혹은 조성의 체계를 대체하고자 했다. 당시 그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긴밀하게 교류했을 정도로 쇤베르크는 시각적 시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회화에서 색이 대상의 시각적 재현과 별개라 생각한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쇤베르크는 조성과는 무관한 음색을 꿈꿨다. 이후 12음 기법을 통해 조성의 체계를 해체한 후 그의 제자들이 음악을 추상적인 시각물로 전이시키는 데 영화를 적극 이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의 근본 음이 화음의 구성을 주도하던 조성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모든 음이 자율화되어 음색만으로 자율적인 시각적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특수효과를 위해 이미지의 시각효과를 증대시키기 시작하며 소리와 동기화된 기하학적 도형의 움직임처럼 시각화된 음악은 곧바로 대중영화의 장치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붉은 배경 아래 나선형의 도형이 소용돌이치며 피어오르기를 반복하는 <현기증>(1958)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주관적 심리를 시각화하는 데 더없이 적합했으며 그를 위해 굳이 조성음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조성의 내적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세계를 보다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던 음악은 역설적으로 영화 안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떠오르게끔 하는 유형화된 심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제한받게 된 것이다. 불안이 그처럼 유형화되었을 때 그것이 더 이상 이전의 불안과 동일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조성이라는 구조의 속박에서 음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쇤베르크의 원대한 꿈은 할리우드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쇤베르크의 음악 자체 안에 그와 같은 불협화음과 질서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불협화음이란 질서에 억압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에 대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며 그것은 당대의 표현양식 중 하나에 불과해졌다. 불협화음이 그 기반이 되는 조성 질서를 강력하게 비준하기 위해선 협화음 체계의 가치가 통용되는 시기여야 하지만 쇤베르크의 시대에 이미 불협화음은 사회의 규범적 법칙에 대한 저항의 양식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12음 기법이라는 엄격한 규칙을 부과한 것은 불협화음이 반복되며 모종의 조성적 화음을 산출해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를 창안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불협화음을 조직화된 전체적 질서와 새로이 화해시키고자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체계화의 충동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과거의 불협화음이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할리우드는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관객에게 친숙한 장르나 스타를 적절히 변주하고 수정하며 세계의 변화 자체를 체계화했다. 그들은 당대의 사회상에서 부정적이라 여겨진 낡은 것들(예컨대 서부극이나 뮤지컬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가 주는 과거성)을 새로이 다가온 사회와 차례차례 대면시키며 그를 거듭 떨쳐내며 나아갔다. 쇤베르크와 할리우드 영화는 오래된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를 자체적으로 갱신하며 진화한다는 점에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가 되었건 대중문화가 되었건 그들은 언제나 역사의 지평 위에 서있다.
이민호 영화연구자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했으며 곁다리로 비판이론과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 탓에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는 한다. 음악은 새벽녘 바쁠 때마다 유혹의 손길을 내밀며 매번 그에 넘어가는 편이다. 거듭 장식음과 변주를 다채롭게 구사하며 모든 성부가 각자 존재감을 뽐내는 시대악기 연주곡들에 홀려서 오랫동안 고음악을 열심히 들어왔다. 아마도 개인과 전체가 일시적으로나마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듯한 음악의 마법적인 순간들을 동경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