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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May 18. 2021

당신이 낭만을 잃지 않는다면

바그너의 오페라와 세잔의 회화

오늘은 세잔과 바그너의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우선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근대미술의 선구자’, 혹은 ‘현대미술의 창시자’와 같은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화가이다. 그가 말년에 고향인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완성한 생트 빅투아르 산의 연작을 보면 그 수식어가 과찬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1887년에 완성한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면 나뭇가지와 산의 능선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이 가득하고 이를 둘러싼 대기는 시원하고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캔버스에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한 가지 주제에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말았던 세잔이기에 이 말 없는 산을 십 년이 넘도록 뚝심 있게 그렸다. 이 연작은 모두 생트 빅투아르 산을 담은 작품이지만, 어떤 것에는 곧 추적추적 비가 내릴 듯 무거움이 느껴지고, 어떤 것에는 초연함이, 또 어떤 것에는 아련함이 느껴진다. 물론 모두 세잔의 작품이기에 특유의 생동감과 힘찬 기운을 담고 있다. 화가는 이처럼 지극히 조형적인 수단으로서 자신의 기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뛰어난 침묵의 언어야말로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비법일지도 모른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887년 경, 유채



이러한 세잔의 양식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Cezanne et moi>(2016)이나 그의 전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오랫동안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까운 동료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굴곡진 경력과 함께 작품세계는 변화를 거듭해야 했다. 


특히 초창기 작품에 주목해야 한다. 순수한 조형 언어를 구축함으로써 현대미술의 길을 열었던 그는 젊었을 때 신비로운 옛이야기와 낭만주의 소설, 그리고 오페라에 열광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의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매우 좋아해서 그림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매우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와 함께 공간을 꽉 채웠던 바그너의 사운드는 이 괴팍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지닌 화가의 가슴을 마구 뛰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세잔의 작품에서 바그너의 직접적인 흔적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바야흐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낭만주의가 절정에 달했으며 특히 오페라 부문에서는 한 편의 소설과 맞먹는 탄탄한 서사를 담아내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무후무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한 편의 오페라가 보여준 종합 예술의 가능성은 많은 예술가에게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단은 사정이 달랐다. 젊은 화가들은 낭만주의를 한풀 꺾인 과거의 사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화가들은 낭만주의적인 색채와 형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술을 모색하고 있었다. 분투하는 화단의 분위기 속에서 세잔은 낭만주의를 향한 자신의 취향을 계속 고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젊은 시절 세잔이 부딪쳤던 가장 큰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세잔이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들라크루아에 필적하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낭만주의 음악과 소설의 영향을 직접적인 언급이나 제목으로써 드러내는 것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소재나 구성에 반영하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1969년 완성한 작품 <피아노 치는 소녀>에는 ‘탄호이저 서곡’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보고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웅장한 오페라의 장면은 찾아볼 수가 없고 침묵 속에서 바느질하는 어머니와 피아노 치는 여동생만을 보여준다. 당시 세잔은 여동생이 치는 곡이 바로 ‘탄호이저 서곡’이었다고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실내를 채우는 음산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바그너의 작품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세잔이 거침없이 자신의 열정을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폴 세잔, <피아노 치는 소녀 : 탄호이저 서곡>, 1869년, 유채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Berliner Philharmoniker)



하지만 1967년에 완성한 <연회>라는 작품이 그러한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준다. 물론 그림의 제목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지만, 등장인물들이 이루고 있는 구도는 즉각적으로 오페라의 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흥에 젖어 뒤엉켜 있는 군중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며 신화적이고 이국적인 요소도 풍부하다. 화면을 관통하는 천과 배경의 터치가 무대에서 휘날리는 장막을 연상하게 한다. 이 그림 위로 바그너의 <탄호이저> 속 '환락의 동기'가 들리는 듯한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수많은 군중이 뒤섞여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는 구도는 낭만주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말이다. 세잔은 전람회를 앞두고 이 작품을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잔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구불구불하고 생기 있는 인물의 실루엣은 그가 이후에 완성한 목욕하는 사람들의 연작에서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잔은 무려 10년 동안 습작을 포함해 200점 이상의 목욕하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그가 그려낸 목욕하는 사람들 모두 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이다(그가 숫기가 없어서 누드모델을 구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나체 그림은 관능과 미학 중심의 여성 누드가 아닌 구도 중심의 그림으로, 저마다 선율을 따라 흐르는 듯한 리듬감이 존재한다. 공간과 리듬을 사용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꽤 음악적으로 들린다. 



폴 세잔, <연회>,  1868년 경, 유채, 130cm x 81cm  



마지막으로 세잔의 작품을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바로 1869년 작 <풀밭 위의 점심>이다. 에두아르 마네의 동명 작품이 화단에 반향을 일으켰고, 젊은 화가들은 마네를 존경하고 또 많이 따랐다. 모네 역시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풀밭 위의 점심>을 완성했는데 마네, 모네, 세잔의 버전을 비교하며 감상하면 퍽 재밌다. 그중 세잔의 버전은 참으로 독특해서 16세기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엘 그레코마저 떠오르게 한다. (스페인 화풍을 모방하는 것이 화단에서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잔의 고뇌가 느껴지는가. ‘현대미술의 창시자’라는 수식어를 얻게 될 자신의 미래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이 예술가는 좌절을 거듭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의 양식을 완성한다.



폴 세잔  <풀밭 위의 점심> 1869년 경, 유채, 60x81cm



이 글을 모두 읽고 난 후 다시 한 번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길 바란다. 이 작품에서도 바그너의 꽉 찬 사운드가 느껴질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당신의 눈동자가 낭만을 잃지 않았다면 말이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897년 경, 유채, 81x100.5 cm



글쓴이 정윤희 (미술비평가)

미술과 공연 작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편안하고 재밌게 쓰려고 노력하며, 그러면서도 본질을 꿰뚫고 싶다. 미술이라는 세계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드가의 차가움,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은 마티스의 명랑함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언젠가는 아이와 유럽의 미술관들을 기행하며 책을 내고 싶다. 아이도 원한다면 말이다. 



※ 이미지출처

폴세잔 

Claude Monet, 1840-1926, Gedachtnis-Ausstellung in unserem Berliner Haus : Februar bis mitte Marz 1928, Galerein Thannhauser, Published 1928 by Galerien Thannhauser in Berlin


바그너

Eigener Scan aus: Werner Richter, Ludwig II. König von Bayern, Verlag F. Bruckmann, München, ISBN:3-7654-1758-0, S. 96


탄호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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