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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un 02. 2021

당혹감이 예술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피카소와 에릭 사티의 컬래버레이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워낙 잘 알려진 화가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조각나고 왜곡된 형태는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전시가 인상주의 전시라고 하니, 피카소의 인기가 밀레나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밀리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대중들이 피카소의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피카소의 생애와 작품을 다루는가 하면, 5월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는 연일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거울 앞에 선 소녀>, 1932년, 유채


위의 그림은 피카소가 1932년에 완성한 작품 <거울 앞에 선 소녀>다. 비록 왜곡된 형태이지만 인물이 지닌 아름다움과 여성스러움은 오히려 더 돋보인다. 특히 여인의 얼굴과 신체를 이루고 있는 동글동글한 선이 인상적이다. 모델은 마리 테레즈 발테르다. 44세의 피카소는 당시 17세의 마리와 연인이 된다. 그녀는 피카소의 여러 뮤즈 중에서도 아름다운 신체 표현의 영감을 주었던 여인으로 피카소에게 전성기를 안겨준 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카소가 대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잔혹함도 서슴지 않고 그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향 스페인에서 일어난 학살을 다룬 <게르니카>는 예술이 지니는 힘을 알려준 작품이었으며, 스페인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 349 x 775cm


<게르니카>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 있다.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게르니카>가 완성되고 14년 뒤인 1951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작품 연도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다. 현재 예술의전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에서는 이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110 × 210cm


왼편에는 무방비 상태의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이, 오른 편에 강철 같은 차가움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학살자들이 칼과 총을 겨누고 있다. 무정한 인간의 모습을 저보다 어떻게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표현들, 사정없이 왜곡되고 조각나 버린 잔혹한 표현들도 바라봐 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피카소가 던진 충격과 화두를 우리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스페인 시골 출신인 피카소가 프랑스 파리에 나타난 것은 1900년, 그의 나이 19세였다. 당시 프랑스와 주변국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암울한 시대를 반영해야 하는 예술가로서는 단지 예쁘기만 한 작품을 발표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하층민의 생활과 고독을 그려냈다. 그런 피카소에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큰 숙제가 있었는데, 입체주의의 실험을 마친 후 어떠한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저 형태를 쪼개기만 한다면 결국 형태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의 실험을 멈추고 잠시 신고전주의로 회귀하여 다시 형태가 매우 분명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광대>, <곡예사 가족> 등을 그렸는데, 이는 광대의 표면적인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곡예사들> 1905, 유채, 212.8×229.6cm |기욤 아폴리네르, 페르낭드 올리비에,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가 등장


그는 몽마르트르에서 여러 예술가와 뒤섞여 시간을 보냈다. 1910년 무렵 그의 주변에는 장 콕토와 에릭 사티, 디아길레프가 있었다. 이들은 아마도 서로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16년 에릭 사티는 디아길레프의 의뢰를 받아 장 콕토의 시나리오에 곡을 붙인 발레곡 <파라드(parade)>를 발표했다. 레오니드 마신이 안무를 맡았고, 피카소가 무대의상을 디자인했다. 이들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드림팀이다. <파라드>에 등장하는 광대 캐릭터는 앞서 보았던 피카소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매우 닮았다. 이들은 거리 위 삶의 고단함과 시대의 낭만을 동시에 지닌 인물들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지 유심히 살폈다.


<파라드(PARADE)> (1917, The Diaghilev Ballet)



그러나 세기의 거장들이 참여한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처음 상연되었던 1917년 공연장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냉소가 감돌았다. 관객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아름다운 발레 공연과는 모든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관객들도 크게 반응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피카소가 제작한 무대의상도, 에릭 사티의 음악도 기이하다. 선율은 불길하고 지나치리만치 반복된다. 사이렌 소리와 타자기 소리, 총소리는 음악의 일부로 에릭 사티가 직접 넣은 소리이다. 등장인물은 또 어떠한가. 건물, 미국 소녀, 중국 광대, 말 등이 개연성 없이 등장하며 그 움직임도 기이하다. 등장인물에 맞추어 동양풍의 선율, 대중음악의 선율도 포착된다. 작품이 초연됐을 당시 이 기이한 음악에 몸을 맡겨야 했던 무용수들의 수고가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약간의 편견만 벗어버린다면 충분히 매력 있는 음악이다. 새롭고 직선적이며 경쾌하기까지 하다. 발레 공연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했더라면 좀 더 쉽게 받아들여졌을 음악이다. 바그너가 낭만주의를 절정으로 이끌어 한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다면, 그 대척점에 있었던 에릭 사티는 당시 훨씬 미미한 인지도를 얻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연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에릭 사티는 무수한 현대 음악가들에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음악의 흐름에 맞춰 안무와 무대를 좀 더 정교하게 수정한 공연, 이 음악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창작물들은 에릭 사티의 음악이 지닌 무궁무진함을 반증하고 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피카소와 에릭 사티의 실험은 충분히 성공적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글쓴이 정윤희 (미술비평가)

미술과 공연 작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편안하고 재밌게 쓰려고 노력하며, 그러면서도 본질을 꿰뚫고 싶다. 미술이라는 세계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드가의 차가움,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은 마티스의 명랑함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언젠가는 아이와 유럽의 미술관들을 기행 하며 책을 내고 싶다. 아이도 원한다면 말이다. 


※ 이미지출처

파블로 피카소 doopedia.co.kr

에릭 사티 http://commons.wikimedia.org/wiki/Image:Erik_Satie_-_BNF2.jpeg

게르니카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 2010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한국에서의 학살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 2010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출처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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