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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un 16. 2021

시를 유영하는 그림,
그림 속 파도치는 선율

드뷔시의 음악과 인상주의 회화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는 1905년 3악장으로 이루어진 관현악곡 ‘바다,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La mer, 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를 발표한다. 이 곡은 당시 클래식 관객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새로운 형태의 곡이었다. 선율은 모든 규정과 틀에서 미끄러져서 자유분방하게 흘렀고, 때론 파도와 바람의 움직임처럼 힘 있게 몰아치다가 어느샌가 이국의 신비로움을 띤다. 전혀 예측되지 않는 선율이지만 드뷔시 특유의 경쾌함만큼은 일관되게 담고 있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던 바그너에 반대하는 이 새로운 형식은 곧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바다를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이 곡은 ‘시’로 비유되어 ‘교향시’라 불리기도 한다.



드뷔시, ‘바다,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19:25~)



드뷔시는 화가들에게만 통했던 ‘인상주의’라는 타이틀을 최초로 획득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규정된 틀을 부정하고 예술가가 느끼는 직관을 극대화해 작품을 완성한다는 점이 인상주의 회화에 비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 예술가 자신이 직접 느끼고 체험한 자연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매우 유동적이면서도 대범한 터치로 선율을 그려냈다. 이후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의 영향력이 강력해지면서 유럽 대륙에 널리 소개되었으며, 이때부터 장르를 넘어 스테판 말라르메,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와 같은 상징주의 시인들과 드뷔시 같은 음악가에게도 반향을 가져왔다. 


하지만 정작 드뷔시 본인은 ‘인상주의 음악가’라는 호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부정했다. 캔버스를 강으로, 들로 가지고 나가 작업을 했던 화가들과는 달리 자신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기억에 의존해 선율을 그린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드뷔시가 그린 바다는 가상 현실이다. 바다가 없는 브르고뉴에서 이 작품을 쓴 드뷔시는 이 작품에 대해 '상상력에 의존했으며, 현실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말라르메와 같은 상징주의 시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음악가와 인상주의 화가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들의 공통분모를 추적해야 하는 상황이다.



드뷔시 '바다'의 초판 표지, 1905



이들의 첫 번째 공통분모는 놀랍게도 먼 이국땅 일본에서 활동하던 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1905년에 출판한 드뷔시의 ‘바다’ 초판 표지 그림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일본 판화는 작은 사탕, 담배, 설탕과 같은 기호품의 포장지로 쓰였으며, 기방이나 농민들의 일상 혹은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본토에서는 B급으로 분류되는 풍속을 다뤘다. 그런데 이 작은 그림들이 유럽으로 건너와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었는가 하면 오늘날의 미술사가들이 일본의 판화를 스냅사진의 발명과 함께 인상주의를 태동시킨 원동력으로 손꼽을 정도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좌) '세 폭 그림. 빨래말리기' 우)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출처 위키백과)



일본의 판화는 형식적으로 대범했고 신선했다. 가령 건물의 기둥이나 틀이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횡단하는가 하면, 인물이 건물의 기둥에 가려져 잘려버리기도 했다. 서양의 전통회화에서는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던 구도였다. 또한, 드뷔시의 ‘바다’ 표지로 쓰인 그림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神奈川沖浪裏)>는 물결치는 파도의 형태가 명료한 선으로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서양의 회화에서는 바다가 이처럼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서양의 예술가들이 보기에 이 그림들은 너무나 쉽게 그려졌으면서도 대상의 생생함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대담한 구도를 습작했고, 그 과정에서 혁신이 이루어졌다. 드뷔시는 가장 존재감이 뚜렷했던 동시대의 작곡가 바그너와 맞서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했고, 야심 차게 완성한 관현악곡 표지에 이 일본 판화 작품을 실었다. 그림 속에서 파도는 높게 일고 있다. 드뷔시의 곡이 새로운 사조의 포문을 열었던 것과 같은 기세로 말이다.


인상주의 회화와 인상주의 음악의 두 번째 공통분모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이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회화로부터 받은 영향은 부정하면서도 시인 말라르메로부터 받은 영향은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만큼 드뷔시는 말라르메를 존경했는데, 말라르메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깊게 교류했던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특히 모네(Claude Monet)를 칭송하며 ‘물의 유동성과 투명함을 화폭에 옮기는 재능’이 탁월한 작가라고 했다. 250여 점의 수련 작품을 그린 모네는 이 작품들에 수련, 물, 하늘 이 세 가지를 담았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3개의 패널이 굴곡진 타원으로 연결된 <수련(Water Lilies)>은 12.7m의 폭으로 모네가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12년이라는 세월을 쏟았다.



클로드 모네, <수련>, 1914~1926, 200 x 1,276 cm (출처 MoMA)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담한 터치와 색상은 시인들의 언어를 자극했다. 인상주의 회화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은 망막에 대상이 맺힐 것같이 생생한 시각적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은 말라르메의 동명 시에 영감을 얻어 완성되었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사랑하는 님프를 그리는 반인반수 판의 나른하고 몽상적인 오후가 절로 그려지는 것 같다. 드뷔시가 시를 음악에 담으며 의도했던 바이기도 하다. 모네의 수련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면 그 감성이 훨씬 풍부해진다. 시를 닮은 그림, 그림을 보듯 생생하게 펼쳐지는 시어, 시처럼 풍부하게 흐르는 음악의 선율은 놀랍게도 서로 닮아있다. 대범하게 그리고 유동적으로 흐르는 터치와 선율은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의 마음을 순간에 사로잡는다.



클로드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연주 코리안심포니)




글쓴이 정윤희 (미술비평가)

미술과 공연 작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편안하고 재밌게 쓰려고 노력하며, 그러면서도 본질을 꿰뚫고 싶다. 미술이라는 세계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드가의 차가움,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은 마티스의 명랑함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언젠가는 아이와 유럽의 미술관들을 기행 하며 책을 내고 싶다. 아이도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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