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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un 30. 2021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실러에서 베토벤, 베토벤에서 클림트


오스트리아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주변국은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활기차고 전위적인 예술 양식이 꽃 피고 있었던 반면, 오스트리아에선 황가의 권위가 건재했다. 여전히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이 즐비했으며, 쇤브룬 궁전 앞에는 왈츠를 추러 가는 귀족을 실은 마차가 오갔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수도 빈(Wien)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와 그들의 작품이 지닌 새로운 힘은 클림트에게도 전해졌다. 당시 독일에서는 이미 표현주의 화가들과 뮌헨 분리파의 활동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에서는 파리의 아카데미가 그러했듯이, 황가의 주문과 취향에 따라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100년이든 200년이든 시대를 앞서가는 것을 천명으로 삼는 예술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답답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클림트는 화가의 자유 의지를 옥죄는 시대를 거부하며 이처럼 선언한다. 


“검열은 이제 충분하다. 내 작업을 방해하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겠다.”


오스트리아의 문화교육부가 클림트에게 빈 대학 본부 천장 귀퉁이에 걸 천장화를 의뢰한 것은 1894년의 일이었다. 재능 있는 젊은 화가 클림트는 이미 많은 그림 의뢰를 받고 있었고 수입도 많았다. 어떻게 보면 이미 성공한 화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성과를 박차고서라도 이제는 진정한 자신의 예술을 할 때가 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천장화를 의뢰한 주문자는 이전에 클림트가 보여주었던 고전적이면서도 우아한 양식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받아 본 클림트의 스케치는 충격 그 자체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 <의학>, <법학>, 1899~1907, 캔버스에 유채


발가벗은 여자들이 온갖 음란한 시선과 자세를 취하며 뒤엉켜 있다. 작품에는 세기말의 불길한 징조와 앎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담겨 있었다. <철학>에서는 깊은 바다와 같은 어두운 심연 속에서 아이부터 성인까지 여러 인물이 부유하고 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거나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으며, 묘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검은 여인의 얼굴, 그리고 물결 속에서는 한 여인이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학문은 인간에게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으며, 인간은 단지 고통 속에 몸부림칠 뿐이라고 클림트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하는 듯하다. <의학>에서도 역시 벌거벗은 여인들과 함께 병든 인물, 해골, 아기의 모습이 하나의 기둥처럼 엉켜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늙고 병들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법학>에서는 문어와 같은 형태에 얽매인 나체의 노인이, 그 주변에는 음란한 시선과 자세를 취한 세 명의 팜므파탈이 있다. 맨 위는 이 상황을 내려다보는 세 여인이 서 있다. 작품은 철학과 권력의 실체,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일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인 1857년,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발간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닌 추하고 악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격동시켰다. 또한, 독일에서는 뭉크를 비롯한 표현주의 화가들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요동치는 인간의 심연과 고통을 그리고 있었다. 1900년에 출간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은 인간의 욕망과 잠재력에 대해 사람들을 눈뜨게 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격동하는 시대를 향한 정직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세 폭의 천장화는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교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철수되어야 했다. 철수된 작품은 명문가의 수집품으로 미술관으로 보내졌지만, 이후 나치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고 관객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흑백사진으로만 세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중 <적대하는 힘>(가운데 벽), <기사>(왼쪽 벽), <약한 자들의 고뇌>, 1902, 회반죽에 채색


클림트의 도전은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에도 담겨 있다. ‘프리즈(Frieze)’란 길게 두른 띠, 즉 벽화를 의미한다. 클림트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빈 분리파(Wien Secession)를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베토벤 프리즈>는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회반죽 위에 칠을 한 프레스코화(Fresque) 기법의 이 작품은 전시가 끝난 후 예정대로 철거되었지만, 이후 미술관에서 원작을 복원했다. 원작이 소실되었다는 점이 역시나 관객을 안타깝게 하는 지점이지만, 복원된 작품은 클림트의 상징인 황금빛을 띠고 있어 다소 아쉬움을 달래준다.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는 오스트리아의 전위 미술가들의 전시라는 점 외에도 베토벤에 대한 존경을 담은 전시라는 점에서 특이했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가 전시장의 2층 벽 전체를 두르고 있었고, 1층 로비에는 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기념상>이 서 있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 천상 낙원의 딸들이여 / 우리는 정열에 취하고 / 빛이 가득한 신의 성전으로 들어간다! /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 중


<베토벤 프리즈>의 모티프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 가사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동명 시를 베토벤이 번안해서 합창곡의 가사로 썼다. 이 곡을 썼을 당시 이 천재 음악가의 귀는 멀어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사유와 영감은 그의 내면에서 무한히 팽창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이 곡을 통해 유례없는 형식과 사유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함께 무대에 세웠으며, 그 웅장한 곡조와 가사는 하늘의 신과 땅의 모든 존재를 아우르고 있었다. 천재 작곡가의 마지막 교향곡으로서 충분히 위용을 갖춘 규모였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29:14~)


이 곡이 초연되었을 당시, 관중석 중앙에 앉아 있었던 황제 부부는 다섯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의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빈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작곡가 베토벤은 보수적인 황가와 귀족뿐만 아니라 전위적인 예술가들에게서도 칭송받고 있었다. 베토벤이 보여준 무한한 확장은 반쪽짜리 세계에 갇혀 있었던 젊은 예술가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베토벤은 생전에 교류하고 때론 흠모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등의 작품을 음악으로 흡수했으며 시대의 상황을 첨예하게 담기도 했다. 극작가를 꿈꾸던 청년 리하르트 바그너는 베토벤의 음악에 감동해 작곡가의 길로 전향했고, 클림트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구스타프 말러도 베토벤을 흠모하고 있었다. 


클림트도 베토벤을 찬양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대열에 함께했다. 다만 이때의 빈 분리파 전시가 꽤 성공적이었다고는 해도 클림트는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일부 시선을 고통스럽게 감수해야만 했다. 그가 베토벤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후세의 평가와 달라진 시선이 클림트와 베토벤, 두 거장이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었다. 그토록 비난받았던 클림트의 작품이 지닌 오늘날의 명성이 말해주듯 인간의 이성과 철학은 이 얼마나 나약하고 하찮은가. 지금 당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검열인가, 억압된 시선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인가. 오늘은 모두가 정직한 응답을 하길 바라며. 



글쓴이 정윤희 (미술비평가)

미술과 공연 작품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근현대 미술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편안하고 재밌게 쓰려고 노력하며, 그러면서도 본질을 꿰뚫고 싶다. 미술이라는 세계로 나를 이끌었던 것은 드가의 차가움,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은 마티스의 명랑함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언젠가는 아이와 유럽의 미술관들을 기행 하며 책을 내고 싶다. 아이도 원한다면 말이다. 


※ 이미지출처

- Gustav Klimt

Великие художники часть 29 Густав   Климт, К., ООО Иглмосс Юкрейн, 2003, с. 2

https://bit.ly/3dq8aOU

- Beethoven

https://bit.ly/2Szye2E

https://bit.ly/360XG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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