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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May 04. 2021

망각의 숲 : 교향곡 제1번, 4악장

트럼보니스트 정대환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77년생 정대환 

저는 자식으로서는 무뚝뚝한 아들이고, 배우자로서는 다정한 남편이고, 아이들에게는 너그러운 아빠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선생님이 성악을 전공하라고 권유하시기도 했고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라떼(?)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악기라고 하면 탬버린, 리코더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죠. 리코더 대회에 나간 적도 있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어요. 저는 강원도에 있는 속초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 관악부가 있었어요. 매년 퍼레이드를 했는데, 트럼본을 하던 선배 중 한 명이 전학을 간 거예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관악부 선배가 음악실을 지나가는 저를 불러 세우더니 "오늘부터 네가 트럼본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정말 시트콤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에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럼본을 잡게 되었어요. 꽤 실력이 늘었고,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원래 저는 그전까지 대학 진학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던 저로서는 대학에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그런데 음악에 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재수까지 해가며 대학에 들어갔어요.


트럼보니스트 정대환 

고등학교 때 관악부에 처음 들어간 후, 석 달쯤 연습하니 트럼본 연주자 중에 제가 제일 잘하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다른 현실이 제 앞에 펼쳐졌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라기보다는 제 눈과 귀와 마음의 수준이 높아진 게 가장 높은 벽이었어요. 제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에 제 실력이 늘 못 미치는 게 저를 힘들게 했어요. 원래 만족감을 비롯해 자신감도 열등감도 전적으로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관두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하지만 딱 1년만 더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독하게 마음먹고 최선을 다해 연습해도 내 기대에 실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때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매일 7시부터 7시까지 12시간씩 딱 1년을 연습하니 달라져 있더라고요. 딱 맞는 단어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지독함, 끈질김 같은 면이 제게 있는 것 같아요.


1997년 대학시절



#Music_ 개인적 취향


77년생 정대환 

저는 요즘 넷플릭스에 빠져있어요. 특히 그중에서도 K-드라마의 매력에 푹 빠져있습니다. 미드나 영드는 잘 안 보는 편이에요. 집중해서 자막을 보고 읽으려면 눈을 뗄 수 없는데 그건 꽤 피곤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응답하라 시리즈입니다. 그중에서도 <응답하라 1988>은 세 번을 봤어요.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랑 <사랑의 불시착>도 재밌게 봤어요. 제가 이렇게 드라마에 빠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태국 연주를 갔을 때였어요. 어떤 이유로 연주가 취소되면서 단원들 모두 뜻밖의 휴가를 얻었죠. 할 일이 없어서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무려 24부작 드라마를 사흘 만에 완주했습니다. 작은 스크린을 통해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드라마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몰입하고 공감하다 보면 마치 제가 다른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트럼보니스트 정대환 

저는 금관 악기를 연주하지만,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굉장한 모순이지요. 트럼본을 잡은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소리 취향만 따진다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ㅎㅎㅎ 저는 바흐를 좋아하고, 피아노나 첼로가 더 취향에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트럼본 음악을 즐겨듣지 않아요. 트럼본 연주를 잘하는 곡을 들을 때와 피아노나 첼로 연주를 잘하는 곡을 들을 때 그 느낌이 너무나 다르거든요. 저는 주로 서정적이면서도 과하지 않는 곡을 좋아합니다. 슈만의 첼로 협주곡(Cello Concerto Op. 129)은 화려한 기교 없이도 풍부한 감성을 외향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2015년 교향악축제 때 문태국 첼리스트와 협연하기도 했어요.



2015 교향악축제 '슈만 첼로 협주곡 a단조' - 지휘 임헌정, 첼로 문태국, 연주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Symphony No.2 in e minor, Op.27)이나 드보르작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은 2018년 209회 정기 연주회 때 했고, 이어 앙코르로 보칼리제를 연주했어요.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는 몇 차례 연주한 적이 있어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Concerto for Cello in b minor Op.104)도 좋아합니다. 이 곡에는 세 대의 트럼본이 사용되는데, 이는 오케스트라에서 매우 드문 편성이에요. 총 세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1악장 알레그로에서는 긴장감과 웅장함이, 2악장 아다지오에서는 슬픔이, 3악장 피날레에서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풍성한 구성을 지닌 곡입니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그가 안내하는 감정선을 따라가며 연속해서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단조 3악장 - 지휘 임헌정, 첼로 마르틴 뢰어, 연주 코리안심포니



#Outlook_ 세계관


77년생 정대환 

나이가 들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말'이에요. 내가 내뱉는 말들을 지키고 살아야 하기에 나이가 들수록 말의 무게가 더해집니다. 그래서 성격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40대에 들어서면서 제가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문장은 '미안하게 살지 말자'입니다. 말하면 미안할 일들이 자꾸 생겨요. 그러니 말이 앞서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 주의를 시키죠. 가능하면 위로나 힘을 줄 수 있는 말만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칠 때만큼은 예외에요. 가르침에는 위로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좋은 스승은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 더 나아가 실체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독주회를 열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컸어요. 제가 평소에 말하던 음악을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들려주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는 더 적어지고, 보여줄 수 있는 건 많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물론 이 또한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말하는 건 쉽지만, 보여주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정대환 

연주자로서는 항상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지만, 모든 게 제 마음대로 되진 않아요. 늘 공존하는 불안감과 충족감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지요. 오케스트라 플레이어로서는 가장 조화롭고 배려하는 소리, 그것이 제가 원하는 이상향입니다. 아리아와 합창은 전혀 다른 개념인 것처럼요. 혼자 잘한다고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모아놓고 부르게 하는 것보다 오래 합을 맞춰온 합창단의 노래가 훨씬 듣기 좋을 거예요. 합창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팀워크란 같은 의미일 겁니다. 많은 인원이 큰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소리에 리버브(Reverb)가 있어요. 단원들이 모두 인이어를 착용하고 사운드를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날 것 그대로의 소리를 들으며 연주해야 합니다. 특히 관악기는 성량이 큰 악기이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더 섬세한 귀를 가져야 해요. "내가 목소리가 제일 크니까 다 나를 듣고 따라와"라고 생각해선 안 되죠. 파트의 리더로서도 '존중'이 중요한 덕목이자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시하는 방식이 성장에 효과를 발휘할 거로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모든 단원이 최선을 다하고 있고 저는 각자의 선택과 방식을,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존중합니다. 오히려 내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편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코심이 이제 가장 합이 잘 맞는 시기에 와있는 것 같아요. 지난 십 여년 간 함께 맞춰온 경험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희 코심의 소리를 기대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201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홀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코리안심포니 단원 정대환  

이 질문을 하시니까 가장 먼저 기억에 나는 무대는 당연히 코리안심포니 단원으로 섰던 첫 번째 무대입니다. 2003년 12월 입단 후 첫 무대에서 정명훈 선생님과 함께했던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Symphony No. 1 C minor op. 68)입니다. 앞으로도 제 연주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일 거예요. 무엇보다 충격적이라서 기억에 오래 남는 공연도 있어요. 2007년 12월 <라보엠> 때 무대에 불이 났던 사건이에요. 공연 초반에 배우가 종이에 불을 붙여 벽난로에 던지는 씬이 있는데, 불이 붙은 종이가 벽난로가 아닌 뒤 커튼에 붙으면서 불길이 번졌어요. 그 후 1년 정도 오페라홀이 개보수를 하느라 공연을 못 했어요. 해외 무대에 섰던 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카네기홀에 설 때는 제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서 졸음과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있어요. 그 외에도 많은 무대가 제 가슴 속에 모두 남아있습니다.



트럼보니스트 정대환 

지난 4월 18일 첫 독주회를 했어요.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독주회를 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벅차고 큰 의미가 있었어요. 저는 트럼보니스트이지만 독주회에서 트럼본 곡은 딱 한 곡만 선곡했어요.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듣는 분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되었으면 했어요. 매일 트럼본을 연주하는 저를 일상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 주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레퍼토리는 제가 좋아하는 곡들로 정했어요. 첫 곡은 알비로니의 오보에 협주곡을 트럼본에 맞춰 편곡해 원곡과는 다른 인상을 주려고 했어요. 두 번째 곡은 필립 스파크의 'Song for Ina'인데, 이 곡은 제 둘째 딸에게 보내는 노래입니다. 연습하면서 틀린 적이 없는 곡인데, 무대 위에서 너무 감정에 빠지는 바람에 실수했어요. 이성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죠. 세 번째 곡은 장 밥티스트 아르방의 'Fantasie Brillante'를 연주했어요. 이어 2부에서는 라스 에릭 라손의 콘체르토 Op. 45 No. 7, 반도네온 작곡가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Oblivion', 스티븐 버헬스트의 'Hiros'를 연주했어요. 한 곡마다 가진 의미도 있지만, 공연의 큰 맥락 속에는 '추모'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4월은 많은 이에게 슬픔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Song for Ina'는 스파크가 친구의 아내를 위해, 'Hiros'는 버헬스트가 자신의 벗을 위해 쓴 곡입니다. 우리 모두 떠나간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리움과 슬픔을 함께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Oblivion'는 망각이라는 뜻인데, 중의적인 의미로 생각했어요. 슬픔이 너무 짙어져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을 잊거나 시간과 함께 흘러가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기도 하죠. 시간 속에는 망각의 숲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중요한 것을 흘리지 않으려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아야만 합니다. 그 숲을 헤치고 나설 때쯤에는 너무 아픈 기억은 조금 연해지길,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지길 바랍니다.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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