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커셔니스트 김은정의 라이프러리
I'm_나라는 사람
77년생 김은정
제 꿈은 줄곧 음악가였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 행사 때는 대표로 나가 부르기도 했고요. 음악 자체가 좋았어요. 그런데 피아노로 예고 오디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끝까지 연주를 못 했거든요. 제가 상심해 있을 때, 친구가 염광여자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있다고 추천했고, 자연스레 진학하게 되었죠. 그곳에서 고적대의 퍼레이드를 처음 봤어요. 보자마자 가슴이 막 뛰었던 거 같아요. 저도 퍼레이드의 일원이 되고 싶어 무작정 고적대에 들어갔어요. 당시 제가 배정받은 악기가 트럼펫이었어요. 그런데 호흡도 딸리고 관악기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배도 자주 고프고. 하하. 그러던 중에 교회에서 벨파트라는 악기를 우연히 접했어요. 당시엔 그 악기가 실로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업이 될지 저땐 상상도 못했죠. 그런데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타악기를 연주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작곡을 전공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고 잠시 작곡 공부도 했어요. 그런데 작곡보다는 연주가 제겐 더 잘 맞더라고요. 타악기로 입시 준비를 다시 시작했을 때가 고3이었어요. 너무 늦게 시작해서 불합격은 당연한 결과였던 거 같아요. 재수하면서 기초를 다지고 음악적인 영역도 넓혀나갔어요. 그렇게 원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 입학하게 되었죠.
퍼커셔니스트 김은정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카데미 타악기 앙상블의 리더로 계셨던 이강구 선생님께서 솔리스트로 협연하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저에겐 너무나도 감사한 제안이었죠. 당시 이강구 선생님께 또 하나 감사했던 건 저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중해 주셨어요. 선생님의 배려가 프로 연주자로서 마음가짐의 밑바탕이 된 것 같아요.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연주를 공연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오케스트라에 대한 갈망은 계속 있었어요. 한예종 재학 당시, 학교가 예술의전당 안에 있다 보니까 자연히 오케스트라 공연을 많이 접했거든요. 그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그렇게 오케스트라 입단을 준비하다가 2004년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리안심포니) 오디션을 봤고, 2005년에 입단하게 됐어요. 벌써 16년 전 일이네요.
Music_개인적 취향
77년생 김은정
몇 달 전에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봤어요. 저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해요. 가요에서 클래식과는 다른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거든요. 특히 <싱어게인>에서 이승윤이라는 가수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노래 실력뿐 아니라, 음악 자체가 자유분방함 그 자체더라고요. 마음속으로 계속 응원했는데, 결국 1등 해서 제가 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하는 피드백과 비슷해서 놀라기도 했어요. 장르는 다르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과 노력은 클래식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현재 오케스트라 활동과 함께 제자 양성에도 힘쓰고 있어요. 사람이 주는 감동이 있는데, 수업 때 학생들에게서 그런 감동을 많이 느껴요.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까 시간이 나면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요.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요.
퍼커셔니스트 김은정
치유의 힘이 있는 음악을 좋아해요. 주로 힐링과 감동이라는 키워드가 어울리는 따듯한 음악들이죠. 대체로 비선율적인 것보다 선율적인 음악인 거 같아요. 그런 음악을 들으면 꿈을 무한하게 심어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제 음악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제가 연주한 곡을 듣고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곡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9번 님로드(Nimrod)예요. 말 그대로 따뜻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곡인 것 같아요. 사실 이 작품은 제게 마음 아픈 곡이기도 해요. 코리안심포니에서 세월호 추모곡으로 이 음악을 연주했거든요. 당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던 기억이 나요. 가슴이 아프기도 하지만, 이 곡이 작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봐요.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제1번 3악장도 생각나네요. 처음에 트라이앵글이 리드를 하거든요. ‘따당 따당’하는 리듬을 따라 피아노와 주고받으면서 진행하죠. 입단하고 얼마 안 되어 이 곡을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 선생님께서 저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더라고요. 얼결에 일어나서 따로 박수를 받았어요. 그때 박수받는 순간이 참 좋았어요. 저에겐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곡이에요.
Outlook_세계관
퍼커셔니스트 김은정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공연 때 보면대가 조금이라도 틀어져 있으면 신경 쓰일 정도죠. 어렸을 땐 ‘완벽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무대 공포증에 걸렸던 것 같아요. 이제는 타악기를 통해 강연도 하고, 제자도 기르다 보니 완벽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생각을 해요. 바로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 멋진 무대를 선사하기 위해 하는 노력의 순간들이 모두 그것이죠. 전 계속해서 발전하고 싶고, 발전하고 있다고 확신해요. 그 모습을 무엇보다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고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친 지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요. 연주는 물론, 제 개인의 삶 속에서도요. 간혹 제가 롤 모델이라고 하는 제자가 생기면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도 제자들과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요. 1년에 딱 두 번 만나는데, 스승의 날, 그리고 제 생일 즈음이에요. 올해는 영상통화로 아쉬움을 달랬어요. 저는 퍼커셔니스트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김은정
어렸을 때는 그냥 튀고 싶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오케스트라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타악기만의 포인트를 사운드로 끌어내는 데 집중하게 됐어요. 전체에서 어떻게 더 꾸며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거죠. 한 번은 오랜 시간 솔리스트로 활동한 친구와 듀오로 마림바를 연주한 적이 있어요. 공연 끝나고 사람들이 제가 그 친구를 계속 맞춰줬다고 하더라고요. 16년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살면서 나름 직업병(?)이 생긴 것 같아요. 참 신기하죠.
오케스트라 안에서는 조화는 물론 타이밍이 참 중요해요. 저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타이밍이 잘 맞춰 원하는 소리를 완벽하게 연주해낼 때 더없이 큰 희열을 느껴요. 오케스트라에서 10년 이상 같은 세월을 보낸 가족들과 합을 맞추는 건 정말 행복한 작업인 것 같아요. 이 타이밍, 합을 위해서 타악기만 따로 녹음도 하고 영상을 촬영해 보기도 하면서 연구를 많이 해요.
Stage_무대 위 순간들
퍼커셔니스트 김은정
앞서 언급했던 <싱어게인>의 스핀 오프 격인 <유명가수전> 프로그램을 보면 김범수, 이승철, 양희은 등 연로 가수들이 젊은 가수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무대가 나와요. 저는 그 장면들이 감동이었어요. 음악적으로도 멋있었지만, 세대가 다른 아티스트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죠. 여유와 테크닉은 '연륜'이 지닌 힘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평소에 제자들과 그렇게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저에게도 그런 연륜이 묻어 나오길 바라요. 제자들과의 컬래버레이션 무대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동기 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가르치는 일도 하지만,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도 해요. 그러다 보니 20년 동안 제 음악 세계는 굉장히 많이, 그리고 자주 바뀌었어요. 같은 곡을 연주해도 끌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죠. 장력도 강해졌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이 가장 좋아요. 계속 발전하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껴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김은정
16년의 세월을 함께했으니 기억에 남는 무대가 정말 많아요. 말러 2번 5악장을 연주하는데, 베이스 드럼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는 듯한 지진을 표현해야 했어요. 역동적이고 남성적인 악기이기 때문에 힘에 부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죠. 그 부분이 클라이맥스였는데, 있는 힘껏 소리를 끌어내다 보니까 손목만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온몸으로 소리를 끌어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영상으로 공연을 봤던 분이 제 표정에서부터 땅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하하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2악장을 연주할 때도 생각나요. 리듬이 빨라서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게 관건인 곡이에요. 하지만 지휘자와의 거리가 있어 껴들어야 하는 디렉션을 받을 때 약간의 시차가 발생했어요. 특히 공연장에서는 더 긴장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됐죠. 하지만 연주는 성공적이었고, 그 타이밍이 주는 희열을 느낀 공연이었어요. 잊지 못할 무대예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