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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Jun 16. 2021

Salut! paris, 당신을 위한 삼중주

바수니스트 표규선의 라이프러리


82년생 표규선

저는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어요. 한글을 처음 배울 때는 흐릿한 점선을 따라 글씨를 쓰는 게 재밌어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연습했던 기억이 나요. 무엇 하나에 빠지면 몰입하는 성격 탓에 혼자서도 잘 놀았던 것 같아요. 손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좋아서 프라모델도 많이 만들었어요. 음악을 하시는 부모님 덕에 집은 항상 음악으로 가득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첼로를 배웠는데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한 달 만에 그만두었어요. 어린 시절의 제 꿈은 환경미화원이었어요.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에 가다가 우연히 보게 된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보고 꿈을 가지게 되었죠. 사람들이 잠에서 깨기도 전에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 보람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이름이 헤아릴 '규'에 베풀 '선'인데, 어른들 말씀처럼 이름 따라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돕는 일에 행복을 느껴요.



#I'm_ 나라는 사람



바수니스트 표규선

바순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저음 악기를 좋아하셨던 부모님께서 권유하셨는데, 당시 변성기가 찾아온 저에게는 저음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거부했어요. 그리고 교회에서 플루트 소리를 듣고 완전히 꽂혔죠. 제가 플루트를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다음날 바로 플루트를 사 오셨어요. 처음 만져본 플루트의 감촉과 그날의 행복했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플루트를 배웠어요. 플루트는 제 인생에 많은 것을 변화시켰어요.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매사에 자신감도 생겼어요. 그런데 실력이 늘지 않았죠. 진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고민이 많았어요. 정체기가 찾아온 그때 바순으로 악기를 바꿔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어요. 좋은 대학에 가려면 경쟁률이 낮은 악기를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꼬임에 넘어간 거죠. 그토록 좋아하던 플루트를 그만두고 바순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바순 소리가 어쩐지 바보 같다고 느껴져서 싫었어요. 그런데 배운지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이상하게 제게 저음 악기가 잘 맞는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플루트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실력도 빨리 늘었고요. 잘한다는 칭찬에 나태해져 연습을 안 했고, 그 결과로 결국 재수를 했어요.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본 후로 오기가 생겼어요. 1년의 인고 끝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이때부터는 바순밖에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좌) 고등학교 1학년 때 플루트 공연 모습 우) 고등학교 합창부 발표회 찬조출연




#Music_ 개인적 취향



82년생 표규선

저는 요즘 노래는 잘 몰라요. 예전에 노래방에 가면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가장 많이 불렀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우울한 감정이 들 땐 절대 음악을 듣지 않아요. 그런 감정을 음악의 기억에 집어넣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연습 이외에 가장 우선으로 하는 일은 리드를 깎는 거예요. 관악기 연주자에게 리드 관리는 생명이거든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해요. 커피 맛에 눈을 뜬 건 31살,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게 되면서부터예요. 아내가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저도 좋아하게 되었죠. 지금은 집에서 핸드 드립과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실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어요. 최근에는 취미로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 작업을 아카이빙하고 모니터링하려는 목적으로 영상을 올려두었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 조회 수가 꽤 되더라고요. 그게 재밌게 느껴져서 꾸준히 영상을 올리고 있어요. 바순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여러 콘텐츠를 기획 중입니다.





바수니스트 표규선

바수니스트로 현시대를 살면서 노르웨이 바수니스트 닥 옌센(Dag Jensen)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그의 음반 중 프랑스 작품을 모아놓은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Musique pour basson et piano)' 음반은 버릴 트랙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프랑스 작곡가들의 음악을 특히 좋아해서 더 애착이 가는 음반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곡은 생상스의 '바순 소나타(Basson Sonate in G major, Op.168)'입니다. 생상스의 유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바순을 이 곡 하나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곡이에요.



대학시절 마스터클래스 후 닥 옌센(Dag Jensen)과 함께 찍은 사진



옌센의 음반을 들으며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해외 음반을 주문해놓고 기다렸다가 받았을 때의 설렘은 지금도 기억나요. 지금은 좋은 플랫폼과 영상화된 공연들도 많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거든요. 저는 음악은 귀로 들을 때 가장 멋지다고 생각해요. 소리에 민감한 편으로 풍경을 보고는 감탄사가 잘 안 나오는데, 좋은 소리를 들었을 때는 쉽게 감동을 받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에만 집중해서 들으라고 말해요. 물론 연주자의 몸짓, 표정을 통해 감동이 배가되는 일도 있지만, 음악만 들었을 때는 감흥이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시각적인 꾸밈이나 트릭 없이도 좋은 음악을 전달할 수 있어야 좋은 연주자라고 생각해요. 제 유튜브에 바순 소나타 공연 실황과 스튜디오 녹음 영상이 있는데, 한 번쯤은 눈을 감고 음악에 온전히 집중해서 감상해보시길 추천합니다.





#Outlook_ 세계관


바수니스트 표규선

바순은 주로 오케스트라에 사용됩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활동만 하다 보면 타성에 젖기 쉬워요. 관악기는 연주를 잘 못하면 바로 티가 나거든요. 오케스트라만 해서는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가끔 실내악 무대에 서거나 개인 활동을 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녹슬지 않기 위해 실내악 무대가 있으면 참여하려고 하고, 2014년부터 독주회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2018년부터는 '아티스트&뮤직'의 지원으로 독주회를 열고 있어요.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하지 못했지만, 제 독주회는 매년 가을에 해요. 개인적으로 리드를 관리하기 가장 좋을 때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제가 가을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실내악이나 독주회 영상을 보면 많은 부족함을 느껴요. 분명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난 후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제가 그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앞으로도 계속 끝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녹음, 녹화, 모니터링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끊임없이 부족함을 찾아 메우는 것이 피곤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 습관이 되어서 즐기는 단계까지 온 것 같아요.



2016년 독주회 리허설 사진



코리안심포니 단원 표규선

제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심)의 단원이 된 건 2008년이에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유학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다음 해에 재도전을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코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6월 말에 한국에 돌아와 8월 말에 시험을 봤으니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어요. 9월에 열릴 뮌헨 콩쿠르를 준비하느라 더 준비를 못 했죠. 당시의 전 어렸고, 원서를 내놓고도 긴가민가 한 상태였기에 부담 없이 시험을 치렀어요. 부담이 없으니 실수도, 아쉬움도 없는 연주를 했죠. 그게 인상적이었던 걸까요? 감사하게 저를 택해주셔서 지금까지 코심의 일원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1st 바순은 그 오케스트라의 음색"이라고 했다고 해요. 이 말은 제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임하는 자세이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이에요. 제가 코심의 바순 수석 자리에 앉아있는 한 베를린필도 따라 할 수 없는 음색을 만들고 싶어요. 물론 오케스트라는 각자 다른 사람들이 여러 악기로 내는 소리입니다. 개개인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휘자의 역량과 그를 따르는 단원들의 참여도, 그리고 화합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청중을 향한 진심도 빼놓아선 안 되겠죠.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코리안심포니 단원 표규선

오케스트라에서 바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바순은 저음 악기로 다른 악기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주로 하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들리지 않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오케스트라 안에 있을 때 행복을 느껴요. 어딘가에 제 역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함께 완성해나간다는 즐거움도 있거든요. 오케스트라 안에서는 '눈치'가 정말 중요해요. 저로 인해 앙상블이 깨지면 안 되니까요. 동료들과 기가 막히게 음정이 잘 맞아 희열을 느꼈던 순간도 많았어요. 오페라나 발레 공연을 할 때는 피트에서 연주하다 보니 옆의 동료와 직전의 프레이즈에 대한 피드백을 몸짓으로 주고받곤 해요. 그러다 흥이 오르거나 연주가 잘 될 때 과하게 표현하다가 미스 톤이 나는 실수를 한 기억도 있어요. 요즘은 대부분의 공연이 영상으로 남겨지기 때문에 소리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녹음되는 음악은 실제 연주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하게 연주해야 하거든요. 무대 위에서, 그리고 음악 속에서 최대한 좋은 소리와 연주를 해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요. 제가 좋아하는 바순 소리를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게 설득력과 매력을 갖춘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가장 좋았던 무대의 순간은 2014년 10월 국립발레단 정기공연에서 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a Sacre du Printemps)'입니다. 바수니스트로 '봄의 제전' 솔로를 할 기회는 평생 몇 번 되지 않는데, 5일간 무려 6회나 되는 공연을 매일 했어요. 바순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연주에서 처음 만난 지휘자 제임스 터글(James Tuggle)과의 기억도 잊을 수 없어요. 음악적인 연결을 한 지점도 놓치지 않고 이어가는 능력과 연주자의 흐름을 존중하는 모습, 순간순간 일어나는 연주자의 실수까지도 커버하는 순발력에 감탄했어요. 지난 6월 4일 '푸르른 낭만' 특히 브람스 교향곡 제2번 라장조도 잊을 수 없는 공연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요즘은 7월 24일에 열릴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를 준비 중이에요. 프랑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의 '오보에,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Trio for Oboe, Bassoon and Piano, FP 43)'를 들려드릴 예정이에요. 개인적으로 워낙 애정을 품고 있는 곡이고, 벌써 12번째 연주예요. 이 작품은 독특하게 2개의 목관 악기와 피아노로 이루어져 있어요. 풀랑크의 전형적인 색채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처음 들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풀랑크가 직접 말한 것처럼 '음색이 명쾌하고 균형이 잘 잡힌 곡'이에요. 곡의 곳곳에서 바로크 양식의 우아함, 파리지앵의 세련미와 유쾌함, 파리의 사랑스러움까지 모두 발견하실 수 있을 거예요. 프랑스로 떠나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번 실내악 공연에서 마음껏 여행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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