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페터 이응우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75년생 이응우
어릴 때 전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친척분들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을 때 한 입 먹고 싶어도 창피해서 다가가질 못할 정도로요. 제가 워낙 쑥스러움을 많이 타고 말수가 적으니까 부모님이 웅변학원에 보냈어요. 중학생 때까지 계속 다녔는데 성격이 바뀌진 않더라고요.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매번 목이 메고 그랬어요. 그래도 친구들이랑 노는 건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수줍다가도 한 번 친해지면 활발해져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음악을 듣는 것조차 즐겨하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19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한창 열풍일 때 저도 밴드 음악에 푹 빠졌어요. 악기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친구와 학교 밴드부에 들어갔죠. 맨 처음 호른을 접했는데, 한 선배가 "너는 입술이 얇으니까 트럼펫을 해봐"라고 권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입술 얇은 것과 부는 건 크게 상관없는데 말이죠. 그렇게 트럼펫을 시작하게 됐어요.
트럼페터 이응우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어질 때는 왜 시작했는지를 기억해라'라는 명언이 있어요. 중학생 때까지 공부를 곧잘 하다가 고등학생 때부터 어려워지니 나름 저 문장에 기댔던 것 같아요. 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 악기로 대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제 모교인 성남고등학교는 밴드부가 유명했거든요. 해마다 관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밴드부 선배들도 악기 전공으로 좋은 대학에 많이 갔어요. 숨겨진 승부욕이 있었는지 잘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배가 아프더라고요. 선배든 후배든 저보다 잘하는 사람을 뛰어넘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바라던 대로 대학에 진학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보니 잘하는 학생이 정말 많더라고요. 저는 일반계 중·고등학교에 다녔으니까 예중·예고 출신 친구들이 쌓아온 음악적 지식과 배움을 따라가기 어렵더라고요.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꽤 충격이었어요. 음악적으로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그럼 악기라도 잘 불어보자’라고 마음먹었죠. 수업과 상관없이 틈날 때마다 연습하고, 놀아도 학교에서 놀았어요.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잤어요. 아침 일찍 학교 수업 듣고 끝나면 학교 문 닫을 때까지 연습하다가 이후에는 마음 맞는 선후배들이랑 술 한잔하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소주를 조금만 먹어도 잠들던 시절인데, 선배들이 들려주는 연주 기술, 음악적인 얘기를 듣는 게 좋았어요. 열심히 하는 선배들이 제 마음에 불을 지폈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그때 동고동락했던 분들을 자주 만나요.
#Music_ 개인적 취향
75년생 이응우
학생 때는 하루라도 악기를 안 불면 스스로 이상하다는 걸 느끼니까 휴가를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내랑 아이와 같이 여행 가는 게 너무 좋아요. 함께할 수 있을 때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캠핑이나 글램핑도 자주 가요.
음악은 록 발라드를 좋아해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이나 솔리스트 곡들도 록 발라드 분위기가 나는 곡이 좋더라고요. 조용히 시작했다가 한 번 '탁' 치고 올라가는 그런 곡들이 제 마음을 사로잡아요. 브라스 밴드 곡 중 필립 스파크(Philip Sparke)의 '플라워데일(Flowerdale)'이라는 곡은 애절함의 끝을 보여주는 트럼펫 솔로곡이에요.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많이 들었는데, 맥주 한 잔 마시면서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저는 노래 들을 때 가사를 주의 깊게 들어요.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지금 연주하는 곡에 가사를 한번 붙여보라고 권하기도 하고요. 언어가 더해지면 메시지가 명확해지고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또, 해외 연주를 하러 가면 앙코르로 '아리랑'이나 '고향의 봄'을 많이 연주하는데, 그 곡들도 가사 덕분에 멜로디가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요. 그 곡들을 연주할 땐 왜 그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어요.
트럼페터 이응우
다른 금관 악기도 마찬가지겠지만, 보통 트럼펫이라 하면 시끄럽고 땍땍거리는 악기로 알고 계세요. 재즈 음악가인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처럼 트럼펫을 감미롭게 연주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트럼펫이라는 악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연주로 다양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요.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의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e)' 1악장도 트럼펫 솔로의 감미로움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클래식 곡이고,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교향곡 3번(Symphony No.3 in D minor)'도 마찬가지고요. 기상나팔 같은 팡파르나 야구장에서 자주 트는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의 '신세계 교향곡(Symphony No.9 ‘from the New World’)' 같은 웅장함도 가능하지만, 브라스 밴드의 트럼펫 솔로를 찾아 들어보시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실 거예요.
#Outlook_ 세계관
트럼페터 이응우
대학 졸업하자마자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입단해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있었어요. 단원으로 들어가서 수석까지 달았죠. 그때 오케스트레이션부터 포지션별로 해야 할 일, 오케스트라에서의 어울림, 인간관계 등 많은 걸 배웠어요. 오케스트라에서의 트럼펫은 역할이 참 많아요. 다른 악기와 잘 어울리면서도 솔로 연주도 잘 해내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대학생 때부터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어요.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면 무대 위에서 유리할 텐데 저는 그렇지 못해요. 여전히 수줍음도 많고 남 앞에 혼자 서 있는 게 떨리거든요. 심지어 트럼펫 솔로 연주가 괜찮았던 날,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저를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면 그것도 너무 창피해요. 속으로는 기쁜데 말이죠.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악기들과 다 같이 어울려 있는 게 저에게는 큰 위안이 돼요.
연주자로서는 완벽주의 성향을 지녀야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연주자로서 시야가 확 트였던 때가 있는데, 2005년에 네덜란드로 유학 연수를 다녀온 게 계기였어요. 2년간 암스테르담음악원 최고연주자 과정을 밟으면서 많이 배웠죠. 보통 좋은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유학을 가지만, 저는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있는 곳으로 갔어요. 당시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서트헤보우(Royal Concertgebouw)'였거든요. 프리츠 담로우(Fritz Damrau)가 그 당시 로열 콘서트헤보우의 수석이셨는데, 제가 '당신에게 배우고 싶다'라고 메일을 보냈고 회신이 왔어요. 프리츠 담로우와 테오 월터스(Theo Wolters)라는 두 선생님께 수학했죠. 테오 월터스는 솔로 트럼펫 연주자이면서 부지휘자도 겸하고 계셨어요. 지휘도 하시니까 악기 이상의 음악적 관점에서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유학 가기 전까지는 트럼펫 소리에만 귀 기울였다면 이후로는 전체적인 어울림과 조화를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이응우
2011년 결혼 후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아내와 같이 어학연수를 갔어요. 영어 실력을 키워서 해외 무대로 진출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2013년 초에 한국에 돌아와 그해 9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 입단했어요. 그간의 경험들이 입단할 때 도움이 됐어요. 코리안심포니의 레퍼토리는 다양하고 풍성해요. 많이 연주할 때는 1년에 103회까지 한 적도 있어요. 단원으로서, 연주자로서 고민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기량'이죠. 나이가 들어서도 기량을 유지하려면 자기 연습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오케스트라 연습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하루 1시간도 내기 힘들 때가 있어요. 주말에도 연주 스케줄이 있다 보니 보통의 아빠들처럼 딸과 많이 놀아주지 못하는 게 참 미안해요. 그래서 연습 시간도, 가족과의 시간도, 아무리 짧아도 더 집중하려고 해요.
음악을 하면 할수록 '어울림'만큼 중요한 가치가 없는 것 같아요. 연주자와 연주자, 지휘자와 연주자가 잘 어울려야 좋은 울림이 나요. 조금 부족해도 같이 맞춰나가야 해요. 어울림 앞에 한 글자만 빼면 '울림'이잖아요. 그걸로 다 설명이 되는 것 같아요. 함께하는 단원들에게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따뜻하면서도 엄한 선생이 되고 싶어요. 저의 스승이신 김길수 선생님께서 하시던 트럼펫 캠프를 제가 물려받아서 7~8년째 방학마다 하고 있어요. 트럼펫을 전공하는 고등학생·대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서로 배우고 교류하는 시간을 보내요. 학생들에게 동료를 만들어준다는 게 선생으로서는 참 뿌듯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좋은 스승과 선배를 만나 좋은 에너지를 얻었던 것처럼 학생들도 좋은 동료를 만나 즐겁게 음악 할 수 있기를 바라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제가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날짜도 기억나요. 2002년 6월 18일, '대한민국 대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경기가 있던 날이었어요. 그날 예술의전당에서 연주가 있었는데 경기와 거의 같은 시간대였어요. 관객이 50~100명 정도 왔을 거예요. 연주 시작 전에는 우리나라가 1:0으로 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연주가 아주 마음에 들게 잘 됐고, 끝나고 보니까 역전 골을 넣어서 우리나라가 2:1로 이겼더라고요. 정말 너무 기뻤어요. 당시 오케스트라에 오래 계셨던 분들도 손꼽히게 잘 된 명연주였다고 하셨거든요. 며칠 뒤 신문에 '월드컵 16강 전에 버금가는 훌륭한 연주였다'고 기사도 났어요. 그날 연주한 곡이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하는 말러 '교향곡 제5번(Symphony No. 5 in C sharp minor)'이었는데, 아마 승리를 예견한 팡파르였나 봐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했던 모든 연주가 소중한데, 하나를 꼽자면 정치용 예술감독님 취임 연주회 때 연주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제8번(Symphony No. 8 in C minor)'이 생각나요. 브라스가 워낙 힘든 곡인데 잘 소화해냈어요. 다가오는 7월 30일에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정기 기획 공연인 <천상의 노래>가 열릴 예정이에요.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 말러 '교향곡 제4번(Symphony No. 4 in G major)'을 연주해요. 보통 교향곡과는 다르게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곡이라 그 어울림을 기대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특히 가사를 알고 들으면 더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8월에도 신나는 재즈풍의 라인업을 준비하고 있으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7/30(금) 19:3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 휘 | 바실리스 크리스토풀로스
소프라노 | 이명주
연 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프로그램]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말러 교향곡 제4번 사장조
예매링크: https://bit.ly/3qVCBC8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