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박인희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91년생 박인희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아버지는 국문학을 전공하셨어요. 두 분 모두 대학에서 오래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그 영향인지 저도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뭐라도 배워보라던 친할머니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이모할머니께 바이올린을 처음 배우게 되었어요. 음악가로 살아간다는 게 너무 힘든 길이라는 걸 잘 아셨던 어머니는 제게 음악을 안 시키려고 하셨어요. 게다가 제가 워낙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음악과 안 맞는다고 생각하셨죠. 다만 한 가지에 심취하면 줄곧 파고드는 면도 있어서 그건 장점이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전공 결정 후 방황한 시기가 좀 길었는데, 하고 싶은 게 많을 때이기도 했고, 선생님도 너무 무서워서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을 그만두었어요. 그런데 반년 뒤에 선화예고 입시 곡을 찾아봤더니 전에 했던 곡이 나온 거예요. 막상 그만두고 나니 그동안 해 온 것들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험에서 떨어지면 미련 없이 접으려 했는데, 합격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바이올리니스트 박인희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직전에 만난 정남일 선생님은 제 삶과 음악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주신 분이에요. 반쯤 억지로 해 오던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기게 되었으니까요. 덕분에 제가 이 길을 계속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학 입시를 목표로 배우긴 했지만, 사실 결과는 그냥 따라온 것 같아요. 안타깝게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선생님과 짧은 순간이나마 음악을 함께하고 인생을 나눌 수 있던 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좋은 영향을 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어요. 저는 사교육을 그리 많이 받은 편은 아니에요. 부모님께선 제게 학원·과외 한 번 안 보내고 레슨도 많이 못 시켜준 걸 미안해하시지만, 지나고 보면 스스로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음악가에게는 좋은 스승도, 내가 고민하고 연구하는 시간도 모두 필요해요. 지금도 여전히 방향성을 계속 탐색하고, 배우며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쌓인 것들이 비로소 내 것이 되어 나만의 음색과 좋은 음악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Music_ 개인적 취향
91년생 박인희
어머니가 발레단 피아니스트셔서 어릴 때부터 발레를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어요. 스포츠 관람, 책 읽기가 취미인데, 최근에는 쉴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체력 관리를 우선으로 두고 틈틈이 스트레칭과 운동을 하고 있어요. 음식은 맵고 자극적인 것, 카페인 들어간 걸 잘 못 먹고 그 외엔 다 좋아합니다. 직업이 연주자이긴 하지만, 음악 자체를 사랑하는 '클래식 애호가'이기도 해요. 대학 다닐 땐 오페라에 심취해 있었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피아노곡을 즐겨 들었어요. 요즘은 감수성이 풍부한 현악 작품들이 좋고, 클래식 외에는 박효신 씨 노래로 위로 많이 받았어요. 뭐 하나에 꽂히면 계속 그것만 듣는 편입니다. 아티스트도 마음에 드는 연주를 발견하면 그 사람의 다른 레퍼토리도 다 찾아 들어요.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Christian Ferras),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를 좋아해요. 취미 삼아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는데, 연주를 녹화하는 일은 항상 스트레스도 받지만 스스로 피드백하고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바이올리니스트 박인희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작곡가마다 매력이 있죠. 세월이 흐르면서 음악적 취향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20대 땐 고전파 모차르트를 좋아했고 현대곡이 잘 맞았는데, 30대가 되니 좀 더 깊은 낭만주의 음악이 끌리더라고요. 최근에는 슈베르트, 시벨리우스, 글라주노프를 좋아하고, 연주자로서 정말 잘하고 싶은 작품은 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곡들이에요. 이들의 작품은 평생 연구할 과제인 것 같아요. 특히 바흐의 샤콘느는 제게 너무 특별하고 가장 애착이 가는 곡입니다. 입시 때부터 오래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고, 곡에 담긴 의미와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 와닿더라고요. 이 곡의 조성인 D minor가 특히 애틋하면서 슬프지만 차분한 느낌이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성이기도 해요. 요즘도 연주할 때마다 새롭고, 접근할수록 무반주 그 자체로 완성형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슈베르트 환상곡 C Major, 비에냐프스키 협주곡 2번 2악장 역시 들으면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에요. 실내악곡은 슈만과 브람스 피아노 4중주, 슈베르트 현악 5중주처럼 호흡이 길고 깊은 표현을 지닌 곡들이 좋아요. 피아노곡 중에서는 김선욱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브람스 인터메조(Intermezzo) Op.118-2를 좋아해요. 한동안 무한 반복하며 들었던 연주예요.
#Outlook_ 세계관
바이올리니스트 박인희
음악은 현재의 제가 살아가는 의미이자,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에요. 저는 바이올린이라는 매개체로 꾸밈없이 내면의 진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음악으로 본연의 나를 온전히 표현하고 나만의 소리를 뽑아내고 싶어요. 최근 몇 년간 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살기 위해 음악을 했어요.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저 자신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더 절실했고, 열정을 쏟았던 것 같아요. 10년 전, 5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듯, 음악에서도 많은 것들이 바뀌는 걸 느껴요. 추구하는 음악도 조금씩 계속 달라지고 있고 인생에서 겪는 일들도 연주에 투영되는 것 같아요. 음악가는 리허설과 연주하는 매 순간 극도의 긴장과 체력 소모를 감내해야 하는 직업이라서 예민하고 자기검열적인 면이 강할 수밖에 없어요. 저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심한 수전증과 빈맥 때문에 연주에 어려움을 겪어 왔고, 매번 어떤 두려움과 불안감을 안고 리허설을 하고 무대에 올라갑니다. 하지만 막상 관객들 앞에서 연주할 때는 또 큰 보람과 희열을 느껴서, 그래도 이 길을 계속 갈 운명이구나 싶기도 해요. 제 음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더 열심히 해야죠. 늘 연주가 끝나고 나면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제의 경험을 딛고 오늘은 한발 더 나아가 좋은 음악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박인희
대학 졸업하자마자 코심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벌써 8년째 함께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독일 가기 전에 1년만 머물 생각으로 연수 단원을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유학을 접은 후 정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어요. 2016년 정단원 오디션 볼 당시에는 따로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몸 상태도 안 좋아서 반쯤 내려놓고 ‘그냥 내 할 것만 하자’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다행히 제 연주를 좋게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죠. 그간 오래 아프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들도 많았어요. 여러 선생님들께서 도움을 주셨고 큰 힘과 의지가 되어 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하루하루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고,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음악으로 삶을 채워갈 수 있음에 행복을 느껴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바이올리니스트 박인희
제가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는 있지만 결국 연주자는 관객들과 소통할 때 가장 즐겁고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졸업 후에 처음 국제 콩쿠르에 나갔어요. 콩쿠르에서 베토벤은 효과가 나지 않아 다들 피하는 곡인데, 저는 베토벤 협주곡을 하고 싶어서 파이널 무대에서 전 악장을 연주했죠. 저 스스로는 좀 아쉬운 연주였지만, 끝나고 어떤 분이 오셔서 ‘너무 좋았다. 행복하게 연주하는 게 느껴졌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어떤 결과보다도 더 큰 보상으로 다가왔어요. 다른 국제 콩쿠르에서도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분들이 많았어요. 관객들이 저의 바흐 연주를 좋아해 주셨고, 특히 어린 아이들이 정말 열정적으로 관람하더라고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어요. 내 연주가 이 아이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줄 수 있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무대였다고 생각했어요.
음악가는 내면의 목표와 방향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나의 진심이 음악을 통해 잘 드러났으면 좋겠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무대 위 순간보다 그 무대를 준비하는 시간들이 더 중요해요. 솔로와 오케스트라, 실내악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고, 많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다 보면 체력을 안배하는 게 정말 어려워요. 컨디션 조절이 안 되면 심리적으로도 흔들리거든요. 그래도 그 안에서 배울 점들을 계속 찾아가고 연주에 적용하려고 해요. 배우고 느낀 걸 토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데서도 보람을 얻고, 제 안에 채워지는 것들도 많아요. 음악은 끝이 없다는 걸 항상 체감하게 됩니다.
코리안심포니 단원 박인희
오케스트라에서 제1 바이올린은 멜로디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악기 음색의 특성상 저음역부터 고음까지 표현의 폭이 굉장히 넓어서 매력적이죠. 바이올린만이 낼 수 있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결이 있는데 저는 특히 고음을 연주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오케스트라의 묘미는 소리가 함께 섞이면서 전달될 때 오는 전율에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표현을 같이 만들어야 하기에 내 역할에만 빠지지 않고 파트 내에서 음색을 맞추고, 다른 파트와도 호흡을 함께하는 데 신경 써야 해요. 공연마다 다른 지휘자와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음악적 해석이나 타이밍, 원하는 음색 등이 다 달라서 매 순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죠. 정말 짧은 찰나에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직업이라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더 큰 것 같아요. 하지만 좋은 연주를 해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코심 공연 중에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가장 좋았던 공연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올해 2월 정기 연주였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얘기하고 싶어요. 유명한 레퍼토리를 잘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데, 연주를 만들어가는 리허설 과정 내내 보람이 있었고 무대에서도 모두가 함께 같은 마음으로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던 연주였어요.
오케스트라와 달리 실내악이나 솔로는 오롯이 자신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어요. 지난 7월 24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프렌치 시크> 실내악 공연이 있었고, 11월에는 독주회가 예정되어 있어요. 실내악은 오케스트라와 솔로에서 필요한 부분들이 모두 집약되어야 하는 장르라 쉽지 않지만 즐거움도 커요. 이번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에서는 생상스의 ‘바이올린과 하프를 위한 환상곡’을 연주했어요. 제게 생상스는 낭만파 중에서도 애착이 가는 작곡가인데, 표현되는 감정선이 예쁘고 제 음악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이 곡은 처음 들었을 때 숨겨진 보물을 찾은 느낌을 받아서 줄곧 좋아했어요. 하프와 어우러지는 울림이 매력적이고, 두 현악기만으로 이렇게 섬세한 색채와 아름다운 선율을 뿜어낼 수 있다는 점에 끌렸어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이번 무대를 통해 관객분들과 깊은 감동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음악에는 강한 치유와 위로의 힘이 있어요. 저도 음악을 통해 많은 위안을 얻거든요. 과거 연수 단원 시절에 현악 4중주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했었는데, 시각장애인분들이 연주를 듣고 눈물 흘리는 걸 보고 굉장히 뭉클했어요. 우리에게는 수많은 연주 중 하나지만, 청중들에게 있어서 삶을 위로받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연주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도 더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오래도록 초심을 잃지 않고 다른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