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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Aug 11. 2021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교향곡 Op.32

베이시스트 손치호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75년생 손치호

어릴 때 저도 첫째이고 어머니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그러셨는지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어하는게 많으셨어요. 어린이 수영부터 웅변, 주산, 붓글씨, 펜글씨,  미술, 서예 등 안 배운 게 없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합창단도 하고, KBS ‘어린이 동요 부르기 대회’도 나갔어요. 피아노는 유치원 가기 전부터 쳤을 거예요. 피아노치기 싫어해서 오래 했는데도 체르니 30번밖에 못 쳤어요.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만뒀어요. 저희 아버지는 TV에 나오는 분이셨어요. '별셋 아저씨(손정우, 김광진, 고 박일순)'라고, <TV 유치원 하나둘셋>을 보고 자란 제 연배 분들 이라면 아실 거예요. 아버지는 독학으로 작곡, 플루트도 하시고 음악에 열정이 많으셨어요. 매일 아침 TV로 아버지의 '노래 동화 '를 보고 등교했고, TV 속에 계신 아버지 모습이 익숙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장래 희망을 물어보셨는데 별생각 없이 ‘음악 할래요’라고 했어요. 악기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편이었지만, 저에게 맞는 악기를 찾아주시려고 수소문하고 다니셨죠. 당시 아버지가 창작동요제 출품곡의 편곡 일을 하셨는데, 친한 연주자 분께서 더블베이스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그 분이 저의 첫 은사님이신 배공준 선생님이세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제 손을 보고 악기 하기에는 건강하지 않은 손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손가락도 가늘고, 근력이 적은 손이라고요. 그래도 시작도 하기 전에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더블베이스를 시작했고, 악기를 잡은 지 10개월 만에 서울예고에 입학했어요. 


좌측부터 고 박일순, 손치호의 부친 손정우, 김광진


베이시스트 손치호

악기를 짧게 배운데다 클래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예고에 들어갔으니 실력이 형편없었죠. 1학년 1학기 첫 향상 수업 때였어요.보통 연주가 끝나면 친구들끼리 서로 칭찬해주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너무 못하니까 아무 반응이 없더라고요. 친구들이 제 부족한 실력을 지켜본다는 게 창피했어요. 하지만 그게 동기 부여가 되었죠. 제가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잘 풀리는 것 같았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동아 음악콩쿠르>에 더블베이스 부문이 처음 생겨서 나갔는데, 제가 1등을 했어요.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자신감으로 부풀어 있던 저는 대학원에 떨어지면서 첫 실패를 맛보게 되었어요. 그때 대학생때 은사님이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리안심포니) 수석이셨던 교수님께서 오디션을 권하시더라고요. 졸업식 다음날 바로 오디션 보고 코리안심포니 평단원으로 입단했어요. 1997년 2월이었죠. 입단한 그 해 IMF가 터졌어요. 오케스트라 후원도 중단되어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깊은 고민 끝에 미뤄뒀던 유학을 지금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동아 콩쿠르 입상 후 상장 수여식


#Music_ 개인적 취향


베이시스트 손치호

오래전부터 제 연주를 봐주던 조영호(성남시립교향악단 수석) 형의 도움으로 무작정 독일로 가서 9년을  있었어요. 유학 시절을 생각하면 감사한 게 많아요. 형 덕분에 방도 구하고 입시볼 때 필요한 악기도 빌렸고 유학 생활에 필요한 여러조언을 많이 해주었거든요. 악기를 3개월간 안 잡다가 시험을  봤는데 입학 할 수 있었던건 시험 볼 당시의 연주 컨디션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많이 봐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입학 당시 저를 1순위로 뽑고 싶어 한 선생님이 계셨어요. 고트프리드 엥겔스(Prof. Gottfried Engels)라는 선생님인데, 학생들을 정말 잘 가르치는 분이셨어요. 저와 잘 맞기도 했고요. 유학하는 내내 음악적으로, 개인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던 제 평생의 스승 중 한 분이에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때의 배움에서 힌트를 얻곤 해요.


2004년, Konzertexamen 졸업연주 후 고트프리드 엥겔스 선생님과 함께


제가 지금 사용하는 더블베이스는 독일 유학 끝날 때쯤 사서 15년째 함께하고 있어요. 보통 한국인들이 쓰는 더블베이스보다 줄베개부터 줄받침까지의 길이가 조금 더 길어요. 당시 혼자 왕복 13시간을 운전해서 가서 제가 살 수 있는 금액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걸로 골랐어요. 저음이 정말 좋았거든요. 저는 더블베이스의 저음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을 좋아해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4악장 도입부에서의 첼로·베이스의 어울림,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중 '단두대로의 행진', 말러 교향곡 제1번 3악장의 솔로 파트, 그리고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의 도입부 앙상블을 좋아합니다. '부활'은 죽음 앞에서 삶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길어 올리는 곡이에요. 끝이라고 생각될 때도 제게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곡입니다.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75년생 손치호

생각해 보니 제가 32년간 음악을 하며 살았더라고요. 항상 일만 하니까 특별한 취미나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멋진 휴가를 즐기는 법도 잘 몰라요. 안 바쁠 때도 일을 만드는 편이고요. 굳이 취미라고 한다면 시간이 날때 싸고 그 가격에 맞는 맛을 가진 음식을 찾아서 먹고 사진 찍고 SNS에 올리는 정도라고 할까요?  휴가라고 해봐야 1년에 한 번 정도 경치 좋은 바닷가나 훌쩍 다녀오는 게 다지만, 마음은 항상 어디론가 가고 싶어요. 일상에서 제가 좋아하는 시간은 좋은 사람들과 술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에요. 에틸알코올의 힘을 약간 빌려서 속마음 얘기도 좀 하고요.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시는 시원한 첫 잔이에요. 어떤 날은 집에서 기다리는 맥주 때문에 연주가 끝나고 땀 흘린 상태로 얼른 집에 와요. 씻는 동안 맥주 두 캔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씻고 나와 그걸 마시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진정한 소.확.행이죠. 행복은 멀리서 찾으려 하면 가까이 오지 않는 것 같아요.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클래식을 술에 비유하자면 저에게 모차르트는 라거맥주 같아요. 탄산의 톡쏘는 맛도 있지만 깊은 맛도 있거든요. 베토벤은 달콤쌉사름한 에일맥주, 브람스는 묵직한 밀맥주, 푸치니는 향 좋은 싱글몰트 위스키, 베르디는 달콤하면서 쌉사름한 와인, 차이코프스키는 강하고 한방 있는 보드카 같아요.  제게 말러는 소주 같은 존재에요. '부르크너는 신을 만난 사람이고, 말러는 죽을 때까지 신을 찾아다닌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말러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제9번 교향곡 4악장 같은 곡은 정말 절절하고 쓰거든요. 그가 신을 만났다면 아마 달콤한 곡이 되지 않았을까요.





#Outlook_ 세계관


베이시스트 손치호

더블베이스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바탕이 되는 악기예요. 다른 악기들이 잘 뛰어 놀도록 받쳐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요. 바이올린처럼 확 띄지는 않지만 없으면 티가 나는 '꾸안꾸(?)' 스타일이죠. 더블베이스가 배음(倍音)이 가장 많아서 음역이 잘 맞으면 오케스트라 전체 소리가 풍성해져요. 더블베이스를 콕 집어 소리가 좋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오케스트라 소리가 풍성하다고 하면 베이스가 제 역할을 잘했다고 할 수 있어요. 연주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수십 명의 단원이 순간적으로 합이 딱 맞아떨어질 때예요. 그 찰나가 정말 좋아요. 아마 저희 단원들도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일 거예요. 성악이나 발레와 연주가 찰떡처럼 잘 붙는 순간도 좋고,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향해 관객들이 '브라보!' 를 외치며 뜨겁게 박수를 보내주는 순간도 좋아요. 이건 연주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마력이 아닐까 싶어요. 여러 단원 사이에서 연주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제가 한 명의 연주자라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죠.


손치호 독주회 영상 (손치호 개인 유튜브 채널)


코리안심포니 단원 손치호

귀국 후 두 번째로 코리안심포니 오디션을 본 게 2007년이네요. 유학 후 한국에서 오케스트라를 한다면 다시 코리안심포니에 오고 싶었어요. 제게 코리안심포니는 꼭 친정 같아요. 부수석으로서 제 목표는 정년 은퇴할 때까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있는 거예요. 함께하는 단원들이 인정하는 부수석이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차츰 근력이 달리지만, 프로는 상황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을 쪼개서 2년에 한 번씩 독주회를 하는 것도 그 이유에요. 계속 연습하며 도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죠. 저보다 열 살 많으신 악장님이 지금도 훌륭한 연주를 하시는 걸 보면서 저도 그렇게 음악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욕심으론 독주회를 9번 하고 싶어요. 말러나 베토벤의 교향곡도 9번까지 있잖아요. 뭔가 꽉찬듯 하지만 살짝 부족한 9라는 숫자가 매력도 있구요. 곧 7번째 독주회를 할 예정입니다. 더블베이스 소리를 들으러 무대를 찾는 관객은 없겠지만, 제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제가 SNS에 단원들 사진 올릴 때마다 자주 붙이는 해시태그가 두어개 있어요. #연주할때빛나는사람들 #무대에서빛나는사람들. 연주만 들어가면 집중하는 단원들이 정말 멋있어요. 제가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도 좋고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베이시스트 손치호

지금도 잊지 못할 연주가 있어요.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우리 학교가 개교 50주년이었거든요. 그때 말러 교향곡 제2번을 기념 연주로 준비하게 되었어요. 그때 지휘하신 교수님께서 몸이 안 좋으실 때여서 높은 의자에 앉아서 지휘하셨는데, 곡이 절정을 향해갈 때였어요. 5악장 '부활'합창 중에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죽은 것들은 다시 일어나리라"라는 가사가 나와요. 그때 선생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지휘를 이어가시는 거예요. 연주자며, 관객석이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이 난리가 났어요. 깜짝 놀랐죠. 그때의 그 극적인 장면과 놀라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음악은 가끔 초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손치호

코리안심포니에서의 연주는 합이 환상적이었던 순간이 많아서 딱 하나만 꼽을 수 없을 정도예요."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수백 명쯤 되는 느낌이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매번 그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항상 최선을 다해요. 8월 22일에 설 2021년의 일곱 번째 정기공연 '신세계'를 준비하고 있어요.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교향적 무곡, 코른골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 마단조 '신세계로부터'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처음엔 프로그램 구성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미국이 떠오르는 프로그램 구성 같아요. 미국에서 시작된 뮤지컬, 헐리우드 영화음악을 많이 작곡한 작곡가의 협주곡, 이방인이 초기 미국에서 고향을 그리워 하며 작곡한 교향곡.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은 워낙 많이 아시는 곡이라 더 부담되기도 하지만, 좋은 연주 들려드릴 수 있도록 연습에 매진하고 있어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신나는 맘보 무대 역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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