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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Aug 24. 2021

작은 것들을 위한 교향시
'천국의 합창'

플루티스트 김지혜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좌) 미국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우) 중학생 때 활동했던 오케스트라


83년생 김지혜

대기업 주재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한국·홍콩을 오가며 자랐어요. 시애틀에서 태어나 7살에 처음 서울에 왔고, 10살 때 다시 캘리포니아로 갔어요. 그리고 6년 뒤 한국에 돌아왔죠. 16살이면 미국에서는 고등학생(9학년)이지만 한국은 중학교 3학년이거든요. 중학교 졸업도 두 번, 고등학교 입학도 두 번씩 했어요. 이후 서울예술고등학교를 2년 다니다가 홍콩으로 가게 됐어요. 홍콩한국국제학교(KISHK)를 졸업하고 마침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면서 한국에 정착하게 됐죠. 그땐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한국어를 쓰셔서 잊어버리진 않았지만, 나라를 옮겨 다닐 때마다 한국어·영어가 뒤섞였어요. 말이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환경이 바뀐 탓인지 어릴 때는 내향적이고 말이 없어서 어머니가 무척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대학 때 교양 과목은 영어 수업 위주로 들었어요. 지금도 책 읽을 땐 영어가 더 편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저는 호기심이 많고 진지한 어린이여서 10살쯤부터 '인생의 진리' 같은 철학적 고민을 하고 살았어요. 한번 생각에 빠지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게 들어가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 복잡함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플루티스트 김지혜 

부모님 두 분 다 영문학 전공을 살린 직업을 택하셨지만, 가족들 모두 음악을 좋아해요. 어머니도 성악 해보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로 노래에 재능이 있으셨거든요. 저도 노래하기를 좋아했고요. 처음 접한 악기는 7살 때 한국에서 배운 피아노였는데, 선생님이 무서웠다는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미국으로 건너가 6학년 때 미술·음악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해야 했는데, 엄마가 300불짜리 야마하 플루트를 가져오신 거예요. 내심 바이올린이 하고 싶었던 제 의지와 상관없이 플루트를 하게 된 거죠.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선견지명이 있으신 것 같아요. 지금은 플루트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클래식 전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초견이 좋은 편이더라고요. 악보도 빨리 읽고 배우는 속도도 빨랐어요. 플루트 배운 지 6개월쯤 됐을 때 미국플룻협회(National Flute Association, NFA)에서 주최하는 지역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어요.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죠. 배운 지 3년쯤 됐을 때 전공으로 삼기로 결심했어요. 부단한 노력과 단련 뒤에 음악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예요.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며 갖은 생각으로 꽉 차 있던 제게 음악은 ‘인생은 고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준 탈출구였어요. 





#Music_ 개인적 취향


83년생 김지혜

어릴 적 들은 노래는 그 추억이 몸속에 배어들어요. 제가 10대일 땐 R&B가 대세였어요. 보이즈 투 맨, 머라이어 캐리, 토니 브랙스톤 등 그때의 R&B 감성은 지금도 좋아해요. 저는 주로 대만계, 일본계 혼혈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이랑 집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자주 놀았어요. 지금도 k-pop이 유명하지만, 그때도 미국 아이들도 한국 노래를 좋아했어요. 솔리드나 쿨도 인기가 많았죠. 노래를 워낙 좋아하고 특히 노래할 때 몸으로 전해지는 울림이 좋아요. 노래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는데, 제가 잘한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그저 음악이라는 세계 자체가 좋았고,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음악을 틀거나 악기 연주하는 걸 영어로 ‘플레이(Play)’라고 하잖아요. 연주하면 말 그대로 재밌게 놀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아마 그 생각이 음악을 선택하는 데 동기부여가 됐을 거예요. 재미있게 사는 게 중요하니까요. 요즘도 아무도 없는 연습실이나 차 안에서 아무 노래나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어요. 잘하는 거랑 상관없이 그냥 막 부르는 거예요.

 
 

플루티스트 연주자 김지혜

저는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와 피콜로를 연주해요. 연주 비중은 플루트 30%, 피콜로 70% 정도인 것 같아요. 피콜로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음역이 높은 관악기로, 작은 플루트 모양이에요. 대학 때 필수로 자매 악기를 배우면서 피콜로를 연주하게 됐어요. 불기 좋게 개량된 악기는 아니라서 연주하기 까다롭지만, 저는 피콜로 연주가 즐거웠어요. 한 곡에 플루트랑 피콜로가 같이 나오면 번갈아 가면서 불기도 해요. 제가 작곡가 중 베토벤을 가장 좋아하는데, 특수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고전 음악의 계급성을 처음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교향곡에 최초로 피콜로·타악기를 넣은 작곡가이기도 하고요.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취향도 저랑 잘 맞아요. 그 정서가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에 잘 드러나 있어요. 제가 평소에 명상할 때 머릿속에 '천국'을 그려놓거든요. 강가, 큰 나무, 그 아래에서 휴식하는 저와 친구들, 강아지가 뛰어노는 아름다운 모습이죠. 그 이미지는 연주할 때도 마음속에 불러와요. 마음의 공간이 넓어진 만큼 여유도 생겨서 긴장된 순간도 잘 흘려보낼 수 있어요. 가장 좋아하는 곡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이에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가진 자유, 평화, 사랑의 메시지는 제 삶의 가치이기도 하고요. 들을 때마다 가슴 벅차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 피콜로 솔로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대 위의 감상자가 되는데, 그렇게 음악의 홍수 속에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Op.125 - 연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42:20~)




#Outlook_ 세계관



플루티스트 연주자 김지혜

저는 직관이 발달한 사람 같아요. 그래서 악보도 빨리 읽었던 것 같고요. 매 연주가 다르고, 순간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오케스트라 음악도 즉흥 음악이에요. 그 즉흥성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피콜로는 음이 너무 높아서 사람의 귀로 잡아내기 어렵대요. 그래서 직관과 인지 능력이 필요하고,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해 섬세한 계산과 많은 연습도 필요해요. 피콜로는 솔로 악기로서 분명한 역할이 있어요. 요리의 조미료처럼 오케스트라 전체의 색깔을 조금 밝게 해주죠. 보통 피콜로 소리를 '천상의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라고 해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 천상의 소리로 피콜로가 자주 쓰이는데, 정말 아름답고 듣기 좋게 소리를 내야 해요. 플루트는 잘하는 사람이 많지만, 피콜로는 솔리스트 활동에 제약이 있는 악기다 보니 연주자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기에 저는 피콜로를 더 잘 연주하고 싶어요. 오케스트라 속에서 빛나는 악기거든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에서 피콜로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


3~4년 전 명상을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많아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틈날 때마다 그런 시간을 많이 가져요. 내면의 에너지에 집중할수록 몸이 가벼워져요. 세상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음악도 결국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걸 깨달으면서 제 연주도 훨씬 좋아지고, 음악인으로서도 더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외부 활동을 자제해야 요즘은 명상 시간이 늘면서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어요. 항상 삶에 감사하고, 내 삶의 일부인 음악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하기에 더 잘하고 싶어요. 오랜 시간 연습하는 편은 아니지만 집중할 땐 굉장히 몰입해요. 두 시간 같은 한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편이죠. 제가 문학, 철학, 심리학, 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는 것도 결국은 음악을 더 잘 알고 연주를 더 잘하고 싶어서예요. 음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공부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코리안심포니 단원 김지혜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어요. 십 대 때 미국에서 지역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레퍼토리를 꽤 쌓았죠. 대학을 졸업하고 2007년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리안심포니)에 입단했는데, 오디션 때 모차르트 협주곡으로 피콜로, 플루트 둘 다 시험을 봤어요. 두 악기를 함께 하다 보니 1년에 100회 이상 연주에 참여해요. 아마 우리 단원 중 연주가 많은 사람 중 한 명일 거예요. 저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제게 정말 잘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심리 검사를 하면 대체로 과학자 유형으로 나와요. 말수가 별로 없으니 연주로만 말하는 게 저에게는 잘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코리안심포니를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정신노동·육체노동의 균형이 잘 맞춰져 있어서예요. 요즘 저의 활력소는 귀여운 우리 신입 단원들인데, 그 친구들의 젊은 에너지가 참 좋아요. 단원들이야 두말할 나위 없죠. 동료로서, 또 선후배로서 제가 많이 의지하고 좋아해요.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크고요.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동료들에게 느끼는 따뜻함과 관대함, 든든함 같은 감정을 동료들이 저를 통해서도 느꼈으면 해서요.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성격도 조금 유연해진 것 같아요. 제가 바라는 이상형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싶어요.


좌측부터 플룻 부수석 권혜진, 오보에 부수석 이인영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코리안심포니는 발레 음악도 많이 해요. 발레는 오케스트라 연주 위에서 춤을 추잖아요. 무용수들이 춤을 잘 출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가 생동감 있게 연주를 해줘야 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발레 공연할 때 재미있어요. 아주 가볍게 춤추는 발레리나의 독무 장면에 맞게 예쁘고 아름다운 소리를 피콜로로 표현할 때는 정말 짜릿해요. 거의 피콜로가 리드하다시피 하니까 제 악기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코리안심포니는 레퍼토리가 다양해서 발레 외에도 피콜로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덕분에 연주할 때마다 새로워요. 지루할 틈이 없어요.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하는 저희 연주가 관객분들께도 늘 새롭게 닿았으면 좋겠어요. 


이건용, "Princess Bari"- 연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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