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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Sep 08. 2021

Adagio, 흔들림 없는 단단한 숨결로

오보이스트 이인영의 라이프러리



#I'm_ 나라는 사람


94년생 이인영

부모님 말씀으로는 어릴 때 엄청 온순했다고 해요. 아기들이 으레 하는 잠투정도 없고, 잘 울지도 않아서 키우기 편하셨대요. 지금도 말수도 적고,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무던한 성격이에요. 가족들 모두 조용한 편이죠. 어머니는 서양화를, 아버지는 디자인을 하셔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오보에를 배우면서 취미로 미술학원도 다녔는데, 학원에 가면 종일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몇 장씩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남동생마저 미술을 전공했는데, 저는 오보에를 전공하게 됐죠. 중학교 때부터는 무대에 자주 서다 보니 담대한 성향으로 바뀌었어요. 어릴 땐 겁이 많고 주목을 받으면 긴장을 해서 가족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조차 떨리고 싫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넌 항상 편안해 보인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연습 때나, 무대에서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음악에 집중하면 감정 표현에 더 충실해질 수 있어요. 하지만 내향적이기 때문에 첫 만남엔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저를 어려워하기도 해요. 남들이 잘 모르는 저의 여리고 감성적인 면이 연주할 때 드러나는 것 같아요.


오보이스트 이인영

아버지가 클래식을 즐겨 들으셔서 집에서는 항상 클래식이 들었어요. 그러다 오보에 소리에 관심이 생긴 아버지께서 저에게 오보에를 배워보라고 권하셨죠. 그전까지 리코더나 단소는 불어봐도 오보에는 생소했어요. 하지만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인지 오보에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잘하게 되니까 점점 더 좋아졌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우기 시작해서 예중 입시까지 하게 됐어요. 


어떤 힘듦이 있는지 경험해보고 싶다 하시면서 소프라노 색소폰을 배우신 아버지와 함께했던 연주


워낙 어릴 때 진로를 결정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연습이 일상인 생활을 겪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사춘기에는 방황을 좀 했어요. 고작 중학교 1학년인데 쉴 틈 없는 연습에 콩쿠르도 나가야 하고, 교내 안팎으로 경쟁에 시달렸어요. 2~3학년 무렵에는 노력에 비해 제가 생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연습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죠. 서울시립교향악단 오보에 수석으로 활동하시던 이미성 선생님의 연주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말도 많이 해주셨고요. 시야가 넓어지면서 남이 시켜서 하는 연주가 아닌 나를 위한 연주를 하기 시작했어요. 리드를 깎을 때도 장인의 마음으로 공을 들여요. 오보에는 클라리넷과 달리 리드를 자기 입에 맞춰서 직접 깎아야 해요. 날씨와 계절의 영향도 많이 받고요.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리드를 오래 깎는 편이에요. 좋은 오보에 소리를 내기 위해선 물론이고,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요. 준비부터 공연까지 스스로 만족할 만할 무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반응이 좋으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잘 전달됐구나' 하면서 힘을 얻어요.


대학생 시절 이미성 선생님과 함께



#Music_ 개인적 취향


94년생 이인영

부모님과 살 때 동물을 좋아해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웠어요. 이름은 '꼬맹이'이고, 12살이에요. 부모님이 가평으로 이사하시면서 꼬맹이와도 한동안 떨어져 지냈는데, 직접 보살피고 싶어서 서울로 데려왔어요. 부모님은 '뭉치'라는 진돗개를 키우고 계세요. 평소에 뭉치와 놀아주지 못하는 만큼, 쉴 때는 꼬맹이를 데리고 본가에 가서 다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전원 풍경 속에서 꼬맹이와 뭉치랑 함께 뛰어놀다 보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아요. 


평소에도 몸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예전부터 요가와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최근엔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이틀에 한 번 정도 5㎞씩 뛰고 있어요. 뛸 때는 너무 힘든데 뛰고 나면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성취감이 느껴져서 좋아요. 그림은 오보에를 연주하면서 잘 안 그리게 됐지만, 코로나19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최근에 유화를 다시 그려봤어요. 손이 굳어서 잘 그리진 못하는데 그리는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요. 


(좌) 뭉치의 어린 시절 / (우) 꼬맹이, 엄마와 함께



오보이스트 이인영

평소 시끄러운 음악보다 잔잔하고 느린 음악을 즐겨 들어요. 들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음악이라면 가사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예전에는 라디오헤드(Radiohead)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좋아서 자주 들었고, 요즘엔 잔나비의 트렌디한 복고풍 음악을 듣고 있어요. 오보에 연주로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보에 수석 조나단 켈리(Jonathan Kelly)의 절제된 음악 스타일을 좋아해요. 화려하게 기량을 보여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절제된 감정에서 전해지는 울림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라몬 오르테카 퀘로(Ramon Ortega Quero)의 음반 <더 로맨틱 오보이스트(The Romantic Oboist)>도 좋아해 한때 질릴 정도로 들었어요. 낭만주의 음악의 농도 짙은 선율을 오보에 소리로 감상할 수 있어 한 번쯤 들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푹 빠져서 듣는 음악이 그때그때 다른데, 얼마 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공연한 말러의 교향곡 제4번 4악장이 특히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이 곡은 가사가 있어 소프라노 솔로와 함께 연주되는 곡이에요. '천상의 삶'을 읊는 목소리와 연주가 어우러지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는 것 같아요. 브람스의 음악은 듣는 것도 연주하는 것도 다 좋아해요. 교향곡 제1번부터 제4번까지 다 좋아하는데, 오보에 솔로가 많은 제1번을 가장 좋아해요. 이 곡은 브람스가 21년 걸려 완성한 대작인데 난해해서 당대에는 평가가 엇갈렸다고 해요. 저는 교향곡 제1번을 연주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가 메아리치듯 순식간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브람스 교향곡 제1번 C단조 Op.68 - 연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Outlook_ 세계관


오보이스트 이인영

음악은 저에게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숨결 같은 존재예요. 연주하지 않을 때보다 연주할 때 안정감을 느끼죠. 리드를 깎고, 호흡을 연습하고, 소리를 다듬는 시간이 있어야 가장 저 다운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최상의 리드를 얻을 때까지 온종일 리드를 깎기도 해요. 악기를 처음 배울 때 연습하는 롱 톤(Long tone, 한 음을 길게 지속해서 소리 내는 것)을 지금도 매일 하고 있어요. 기본적인 연습이 기교적인 연주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오보에의 매력은 목가적인 음색과 다른 악기들보다 튀는 소리에 있어요. 덕분에 오케스트라 안에서 여러 솔로가 연주할 때도 호소력이 짙은 소리를 내죠. 날카롭지 않은 섬세함을 가지고 있어 앙상블 하기에도 좋아요. 대학 시절 4년 내내 동기들과 목관오중주 팀을 꾸려서 활동했고, 목관오중주 앙상블 '라로제'를 창단한 경험도 있어요. 솔리스트로서는 제가 표현해내는 소리 한 음 한 음에 모든 세포가 달라붙듯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음악은 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매 순간 배워요. 단원들이 한마음으로 소리를 모으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기 위해선 다른 소리를 받쳐주거나 주인공처럼 흡입력을 발휘하면서 때에 따라 유연성이 있어야 하죠. '뭐든 여유 있게 즐기자'라고 늘 다짐하는데, 즐기려면 그만큼 뒤에서 더 큰 노력이 필요한 법이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철저한 준비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해요.


(좌) 라로제 목관 오중주 (우) 대학교 때 목관오중주



코심 단원 이인영

연주자로서 궁극적 목표를 오케스트라 활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보에를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여러 악기의 소리가 섞이는 음악에 흥미를 느꼈거든요. 201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되고 싶어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 자리가 나서 입단하게 됐어요. 오보에는 2명만 모집해서 공석이 잘 안 생겨요. 졸업하자마자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제 인생의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입단한 지 3년 차, 가장 달라진 점은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능력이 향상됐다는 거예요. 입으로 부는 건 오래 해와서 익숙한데 귀로 듣는 건 경험을 쌓으면서 많이 달라졌죠. 서로의 연주를 들으면 들을수록 소리를 함께 만든다는 느낌이었고, 그 감각을 몸에 익혀 나갔어요. 그게 오케스트라 연주자로서 중요한 역량인 것 같아요. 전에는 제가 완벽하게 소리를 내야 좋은 음악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러진 않더라고요. 오케스트라에서 오보에는 전체 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보에가 흔들리면 다른 악기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음의 기준선이자 탄탄한 중심이 되려고 신경 써요. 단원들이 저의 소리로 조금 더 뭉쳐지고, 같은 곳을 보고 간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해요. 그리고 같이 연주하는 단원들도 연주자 이전에 관객이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 좋은 감정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지난 7월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에서 연주한 풀랑크의 삼중주 무대도 좋았고, 8월에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클래식 레볼루션 2021>에서 했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대도 인상 깊었어요. 오보에의 긴 솔로가 있어 준비를 많이 하기도 했고, 제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해서요. 음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2악장의 오보에 솔로는 오보에 연주자들 사이에서 어려운 곡으로 뽑혀요. 목관악기가 반주를 깔아주면 오보에가 솔로 연주를 이끌어가는데, 이번 공연에서 목관악기끼리 견고하게 뭉치며 같은 곳을 향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어요.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 두 가지의 연주 스타일을 병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석사 공부를 계획 중이에요. 다양한 레퍼토리를 경험하고 음악적으로 단단함을 갖추면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원하는 소리를 내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풀랑크 - 오보에와 바순, 피아노를 위한 3중주, 실내악 시리즈 '프렌치 시크' 중


9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선보이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후기 음악적 성과와 여러 가지 음색이 담긴 집약체라고 할 수 있어요. 또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중 유일하게 알토 색소폰이 있는 곡이죠. 이런 매력을 발견하며 음악을 감상하면 제목처럼 무대에서 음이 춤추는 듯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제 연주를 듣는 관객분들이 잠시나마 편안한 시간을 보내셨으면 해요. 코리안심포니의 올해 마지막 정기 공연이니까 아쉽게 예매 못 하신 분들은 온라인 생중계 놓치지 마세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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