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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Sep 17. 2021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원의 기록

희로애락의 앙상블 Op. 27


#I'm_ 나라는 사람


89년생 조진원

어릴 때부터 목소리도 크고 친구들이 잘 따라서 동네 골목대장 노릇을 했어요. 밖에서 노는 것과 컵볶이를 좋아하는 아이였죠. 앞에 나서고 주목받길 좋아해 초등학생 때 전교 부회장을 했고, 늘 학급 임원이나 체육부장 같은 걸 도맡아 했어요. 어머니가 웅변학원에도 보내셨죠. 그때나 지금이나 감투 쓰는 걸 좋아해요. 대학 시절엔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두 번이나 했거든요. 


초등학교 때 받은 '전교어린이회' 부회장 임명장과 '119나의주장발표' 대회 우수 상장


현재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올린을 담당하고, '비발디 앙상블'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데, 목소리와 액션이 큰 저의 성향과 잘 맞아요. 대체로 예전 성격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악기를 연주하면서부터는 작은 부분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꼼꼼한 성격으로 변했어요. 마음대로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꼼꼼함을 넘어서 집착하기도 해요. 새벽 1~2시가 돼도 집에 안 가고 버티다가 다음날에도 연습에 매달려요. 자기애가 강한 편이라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주눅 들지 않지만, 그 대신 스스로 엄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주의라서, 기분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았던 순간이나 행복한 기억을 자주 되새기며 균형을 찾는 것 같아요.


비발디 앙상블 프로필 사진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원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셔서 피아노를 장난감처럼 접했어요. 그런데 시켜서 하는 건 재미가 없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예술중학교에 들어가려고 연습을 많이 했는데 떨어졌어요. 그 일은 인생에서 처음 실패의 쓴맛을 느낀 순간이었고, 저는 어린 마음에 충격이 커서 그 후로 악기 근처에도 안 갔어요.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면서 바이올린을 다시 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어요. 3년이나 쉬었는데도 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나 봐요. 구불구불, 돌고 돌아서 바이올린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인생이란 참 묘해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지만,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에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요. 근데 연습보다 저를 힘들게 한 건 생리통이었어요. 체질적으로 생리통이 심해 생리 기간마다 체력이 고갈됐어요. 하루하루가 소중한데 며칠씩 쉬어야 해서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미국의 지휘자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했던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라는 말은 연주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예요.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디고 대학에 들어갔고, 교수님들의 칭찬을 받을 때면 '음악 하길 정말 잘했다'라고 생각했어요. 남들 몰래 감내한 통증과 마음고생이 좋은 연주 실력으로 보상받는 기분이 들어서요. 지금도 생리통은 고질병인데, 매달 아프다 보니 건강이 최우선이라 평소 컨디션 관리에 신경 쓰고 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 하기 위해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죠.




#Music_ 개인적 취향


89년생 조진원

저는 시간이 나면 명화 퍼즐을 맞춰요. 네모난 세상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한 조각 한 조각 퍼즐을 맞추면 어느새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는 게 좋아요. 모든 조각을 소중히 다뤄야 하는 점도 좋고, 모든 조각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을 때 주는 완성의 기쁨도 있거든요. 소소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즐거움이죠. 오케스트라 연주도 퍼즐 맞추기와 비슷해요. 지휘자만 알고 있는 완성된 모양을 향해 퍼즐 조각들이 서로의 이음새를 맞춰 나가는 거죠. 조각의 아귀가 맞아떨어질 때면 전율을 느껴요. 잠들기 전에는 주로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범인의 흔적을 추격해요.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즐기는 편이라 영화도 공포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고요. 


(좌) 최근 맞추고 있는 명화 퍼즐 (우) 애정하는 추리소설들


그리고 저에게는 롤 모델이 있어요. '바이올린 여제'라 불리는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예요. 13살에 데뷔해 40년이 넘도록 세계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바이올리니스트인데, 클래식 부문에서 그래미상(Grammy Awards)을 4번이나 받았어요. 저는 그분이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여전사처럼 연주하는 모습에 반해 바이올린 활을 처음 손에 쥐었던 때부터 동경했어요. 무터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를 닮고 싶어서 연주도 계속 찾아서 들어요.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함께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이 꽤 유명한데, 들어 보시면 대가의 품격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거예요.


Mozart - Violin Concerto No. 5 (바이올린 : Mutter / 지휘 : von Karajan)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원

원래 발라드를 많이 들었는데, 친구들이 제 이미지에는 댄스가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엔 K-POP 앨범 차트 TOP 100을 들어요. 음악에서도 '인싸' 취향을 갖고 싶어서요. 하지만 노래방 18번 곡은 주현미 님의 '정말 좋았네'에요. 트로트를 두 키 올려서 부르는 걸 좋아해요. 목청껏 고음을 내지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거든요. 클래식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 3악장을 즐겨 듣는데, 첫 선율을 듣자마자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에요. '음악으로 치유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제 안에 묵은 감정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요. 제가 바이올린에 감정을 실을 때 희로애락 가운데 희(喜)가 너무 많은 것 같아 고민이거든요. 밝은 곡을 연주할 때는 저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한데, 다양한 층위가 있는 곡에서는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엔 무딘 건 아닌지, 소릿결에 여운이 없이 기계적인 건 아닌지 연주를 되돌아봐요.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이별을 통해 성숙해지기도 했지만, 큰 슬픔이나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진 않은 편이에요. 그래도 연주와 인생의 경험이 함께 쌓이면서 감정의 깊이가 더해지고 있다고 느껴요. 근데 밝은 클래식 곡이라도 연주자로서 좋아하긴 쉽지 않아요. 직업병 때문에 클래식을 온전히 즐길 수 없으니까요. '이 부분은 이렇게 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앞서고, 연주하는 동안에도 스스로 평가하게 돼요. 그나마 몸이 가는 대로 보잉(bowing)을 즐기는 곡은 엘가의 <사랑의 인사>에요.


라흐마니노프 - 교향곡 제2번 E단조 Op.27 (연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Outlook_ 세계관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원

바이올린은 음역이 넓어 고음과 저음을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악기에요. 감정이 잘 드러나는 악기이기도 해요. 바이올린이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해 소리를 낸다고 하잖아요. 제 목소리와 감정이 현에 마찰하고 나무를 통과해 울려 퍼지는 셈이죠. 악기 소리는 연주자의 성격을 닮는데, 저의 큰 성량처럼 바이올린 소리도 시끄럽고 거칠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소리를 차분하게 다듬고 싶어서 걸음걸이나 자세, 웃는 모습 등을 바꿔보려고도 했어요. 솔리스트로 연주할 때는 무대에서 역동적인 제스처를 취해도 음악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오케스트라 안에서는 몸을 과하게 흔들거나 악보를 요란하게 넘기는 행동도 자제해야 하니까요.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단원을 관찰해 바이올린으로 연결된 하나의 흐름을 느끼려고 노력하기도 해요. 오케스트라 연주는 협동심이 가장 중요해요. 마음과 소리를 이어 좋은 화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 콘택트(eye contact)도 해야 하는데, 악보에 빠져들다 보면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아요. 신경 쓰고 노력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제가 바이올리니스트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것도 많지만, 연주자라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있는 곳엔 어디든 음악이 있지만, 연주자가 되지 않았다면 음악의 넓이와 깊이를 모르고 살 수도 있었겠죠.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 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코심 단원 조진원

대학 졸업 후에 독일 유학을 준비하려고 어학원을 다녔는데, 초등학교 때 부터 계속 지도해주셨던 입시선생님께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 지원해보라 하셔서 입단하게 됐어요. 오케스트라에서 제1바이올린을 맡고 있는데, 멜로디 주도하는 역할이라 힘 있는 음악적 표현을 위해 세밀하게 연구하는 편이에요. 단원과의 관계도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악기와 혼연일체가 되어 곡을 연주해도 오케스트라는 결국 사람의 모임이니까요. 가족보다 자주 보는 단원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좋은 소리를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봐요.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활동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단원들과 무대를 함께하는 순간이 가장 보람차지만, 그간 문제가 없던 건 아니에요. 같은 생활방식이 반복되면서 5년 전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죠. 석사를 준비하다 포기해서 미련도 남았고요. 그때 고민은 잠시 제쳐 두고, 친구들과 만나 웃고 떠드는 시간을 많이 만들었어요.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질 때쯤 본업으로 돌아와 활기를 되찾았죠. 저만의 방식대로 인생의 고비를 넘어서니까 음악적으로도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아요.





#STAGE_ 무대 위 순간들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원

고등학교 3학년 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적이 있어요. 협연의 특징은 협연자가 주인공이 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저였죠. 피아노 소리에만 반주를 맞추다가 자주 들어보지 못한 여러가지 악기 소리가 들려서 되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나요. 반주를 해주시는 많은 단원분들과 함께 집중하고 같은 타이밍에 호흡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오직 저 한 사람에게 신경을 쏟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서인지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지휘자를 포함한 오케스트라 전체와 함께 음악을 꾸려가는 듯한 느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찼어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초반엔 솔리스트 무대를 찾아다니며 연주했는데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단원들과 함께 연주하는 게 즐거워서 점점 현실에 안주했던 것 같아요. 아직 독주회도 한 번 못 해봤어요. 언젠가 제 이름을 건 리사이틀을 꿈꾸는데, 기회가 된다면 개인 활동 범위를 넓혀 가려고요. 저는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해피 바이러스' 같은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조진원의 연주를 들으면 행복해진다, 기분이 밝아진다'라는 반응이 나왔으면 해요.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제가 전달하려는 감정이 주목받진 않겠지만, 솔리스트 무대에서는 진솔함이 가득한 음색으로 행복을 전하고 싶어요.


코심 단원 조진원

제가 입단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저를 제1바이올린으로 뽑아준 지휘자 선생님이 퇴임하셨어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과 함께 퇴임식이 진행됐는데, 제가 꽃다발을 전달해드려야 했어요. 모두 앉아있고 혼자 아무런 사인 없이 무대 밖으로 꽃을 가지러 갔죠. 앉아서 활만 켜다가 그런 행동을 하니 다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후들거리더라고요. 앙코르 때 '석별의 정'이별곡도 연주했는데, 연주자분들이 다 울면서 연주하셨어요. 그 순간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최희준 지휘자 퇴임식


교향곡 무대에서만 할 수 있는 음악적 퍼포먼스에 감탄한 적도 있어요. 말러 교향곡 제1번 4악장에 호른 연주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연주하는데, 웅장한 음악과 소리를 확장하려는 그들의 몸짓에 소름이 돋고 울컥하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저의 '최애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제1번인데, 이 곡을 연주하는 다른 공연이 있으면 어디든 관람하러 가요. 그러니 제가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건 훨씬 더 기쁜 일이에요. 1열보다 가까운 특별석에서 무료 공연을 보는 기분이죠. 지난 9월 8일에 열린 <환상적 무곡>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는 뜻깊은 순간인 만큼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어요. 곡과 상관없이 가장 좋은 순간은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브라보!"를 외칠 때예요. 어디선가 그 소리가 들려오면 머릿속에 '오늘 연주도 성공적!'하고 느낌표가 떠요. 관객들이 우리의 연주 위에서 인생의 다양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는 값진 경험을 하기를 바라요.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제1번 Eb장조 Op.107 - 연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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