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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Sep 08. 2021

멈추지 말아줘요 리듬 속의 그 춤을

무곡과 와인의 환상적인 페어링


와인을 마시다 보면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에너지와 생동감을 느낄 때가 있다. 오픈 직후의 첫인상에 이어 글라스에서 서서히 변화하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다 어느 순간 지금이 정점이란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와인을 마시는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이렇게 와인이 변화하는 모습을 경험하는 일이다. 


예기치 못한 감동을 느끼는 건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클래식 공연에서 곡이 진행될수록 주제 선율이 발전해가고 하나의 음악이 완성되는 것을 감상하는 기분과도 비슷하다. 특히 개성 있는 리듬의 무곡을 감상할 때가 그렇다. 보로딘의 유명한 '폴로베츠인의 춤'에 등장하는 극적인 선율과 라흐마니노프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교향적 무곡'의 관능적이고도 낭만적인 선율에서 열정과 환상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9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 <환상적 무곡>에서 두 곡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가을의 무곡과 잘 어울리는 흥미로운 와인들을 소개한다. 생산지와 포도 품종은 다르지만 모두 춤이라는 공통적인 모티브가 있는 와인들이다.


사진제공: 비노쿠스, 아영FBC


먼저, 순수한 내추럴 와인을 추구하는 발 프리종(Val Frison). 프랑스 샹파뉴 지역의 최남단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서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해 테루아의 특징을 그대로 와인에 담아내는 샴페인 생산자다. 발 프리종에서 생산하는 샴페인들은 샴페인의 3가지 대표 품종 중에서도 특히 피노 누아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풍성한 기포와 복합미가 돋보이는 '발 프리종 뀌베 구스땅(Val Frison Cuvée Goustan'은 100% 피노 누아로 생산한 블랑 드 누아 샴페인으로, 자연적인 젖산 발효를 거친 뒤 오크 숙성을 하고 이후 토착 효모만으로 병 숙성을 한다. 가볍고 빠르게 턴을 하는 댄서의 몸짓이 연상되는 생명력이 넘치는 샴페인이다.


와인 메이커가 삶의 즐거움을 한 잔의 와인으로 표현하듯, 화가는 캔버스 위의 그림으로 표현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다이(Lodi) 지역에서 친환경 시스템을 갖추고 지속 가능한 포도 재배를 실천하는 레인지 트윈즈(Lange Twins)는 이런 의미를 담아 와인을 생산했다. '캐리커처(Caricature)'의 레이블에는 와인병과 글라스를 들고 흥겹게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려 예술적인 디자인과 유머러스한 이미지,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에너지를 모두 표현했다. 이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에 진판델을 블렌딩해 잘 익은 과실의 풍부한 아로마와 오크 숙성으로 인한 복합미가 느껴진다.


사진제공: 신세계엘앤비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 케익브레드 셀러(Cakebread Cellars)가 최상급 포도밭에서 생산한 '케익브레드 댄싱 베어 랜치(Cakebread Dancing Bear Ranch)'는 '춤추는 곰'이라는 이름에서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와인이 생산되는 댄싱 베어 랜치 포도밭은 고지대의 숲 한가운데 자리해 가끔 야생곰들이 포도를 따 먹고 간다. 와이너리에서는 곰에게 겁을 주기 위해 포도밭에 앰프를 설치하고 음악을 틀었지만, 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나 오히려 음악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포도밭에 펼쳐진 이런 진귀한 장면에서 영감을 얻어 와인 레이블에 곰이 신나게 포도를 먹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93%와 메를로 7%를 블렌딩했으며, 포도나무별로 포도가 완전히 익었을 때 손 수확해 고도가 높은 산지의 특성을 섬세하게 구현했다. 풍부한 과실 아로마와 다크 초콜릿 향이 매력적이며 뛰어난 집중도와 구조감, 숙성 잠재력을 갖춰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 씨에스알 와인


남호주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에 자리한 와이너리 몰리두커(Mollydooker)도 춤에 관한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몰리두커는 '왼손잡이'라는 단어의 호주식 표현으로, 와이너리를 설립한 사라(Sarah)와 스파키(Sparky) 부부가 모두 왼손잡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몰리두커 투 레프트 피트(Mollydooker, Two Left Feet)'는 왼손잡이 커플이 함께 춤을 추다가 춤을 잘 추지 못하는 남자가 실수로 여자의 발을 밟는 모습을 레이블에 위트 있게 표현했다. 쉬라즈,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블렌딩한 와인으로 농익은 과실 풍미와 인상적인 타닌, 적당한 산도 덕분에 입안이 꽉 차는 듯한 볼륨감을 느낄 수 있다. 몰리두커는 자체적으로 포도의 과실 풍미를 수치화하고 일정 수치 이상의 고품질 포도만 사용한다. 덕분에 뛰어난 품질을 유지하며 호주 쉬라즈 특유의 진한 풍미를 좋아하는 이들과 섬세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들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재작년 한국을 찾은 칠레 대표 와인 브랜드 알마비바(Almaviva)의 와인 메이커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아함을 유지하면서도 더 쉽고 편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최근 고급 와인들의 세계적 경향이다"라고. 그의 말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프리미엄 와인 메이커들의 노력을 말해준다. 최근 국내 와인 시장의 급격한 성장세를 보면 와인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일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걸 느낀다. 재미있는 이름이나 레이블, 스토리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와인들도 많다.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고 와인이 이끄는 대로 즐기다 보면 포도가 자란 테루아와 생산자의 철학이 전해지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와인이 단순한 술이 아니라 문화의 한 영역이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때때로 새로운 것들에 기회를 주는 것에 인색하다. '취향'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내어주면서 낯선 것들에게는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 취향이라는 녀석은 꽤 깊숙이 자리 잡고 텃세를 부린다. 책, 와인, 음식, 음악, 심지어 사람에게도. 하지만 직접 읽고 맛보고 듣고 느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낯섦, 저 너머에 어떤 환상이 펼쳐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니 오늘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보자. 음악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춰 보자.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환상적 무곡'

9/8(수) 19:3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      휘 | 아르망 티그라니얀

첼      로 | 문태국

연      주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프로그램]

보로딘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제1번 내림마장조

라흐마니노프 교향적 무곡


예매링크: https://bit.ly/3gfgiTG

생중계링크: https://tv.naver.com/l/85165






안미영(와인 칼럼니스트)

잡지사에서 문화예술 담당 기자로 일했고 몇 권의 책을 썼다. 클래식 음악과 와인은 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한 부분이라 생각하며 계속 감상하고, 경험하고, 인터뷰하며, 열심히 쓰고 있다. 현재 와인21닷컴 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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