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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Sep 17. 2021

클래식에서 찾은 신화의 메타포

홀스트는 명왕성의 운명을 알았을까?


기원전 2세기, 대제국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그 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로마가 주체여야 했다. 같은 신을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라고 봤던 그들은 그리스 신들을 로마 신화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예를 들면 로마의 '미네르바(Minerva)'는 공예와 직업과 예술의 여신인데, 도시적이고 지혜롭다는 점에서 그리스의 '아테나(Athene)'와 닮아 있었다. 그러자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면모는 미네르바에게도 스며들어 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그리스 신화는 로마 신화로 통합된다. 마치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 붙은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


서구에 직접 계승된 것도 일찍 멸망한 그리스보다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된 로마 문명이었다. 이후 기독교 공인과 서로마 제국 멸망으로 천년에 가까운 헬레니즘의 암흑기가 도래하지만,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로 되살아났을 때도 신화 속 이름들은 로마식으로 표기되었다. 그리스식 표기가 부활한 것은 신화의 원천에 주목한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로마식을 사용한 생생한 예로 태양계 행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메르쿠리우스(수성), 베누스(금성), 마르스(화성), 유피테르(목성), 사투르누스(토성), 우라누스(천왕성), 넵투누스(해왕성) 모두 로마식 표기에서 유래했다.




태양계 행성을 다룬 대표적 명곡은 20세기를 살았지만, 전통적 작법을 지킨 영국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Theodore Holst)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The Planets)>(1916)이다. 이 곡은 태양계라는 큰 덩어리에 어울리게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 베이스 오보에, 테너 튜바, 알토 플루트, 그리고 오르간이 추가된다. 호른도 여섯 대, 팀파니는 두 세트, 그밖에 다양한 타악기도 필요하다.



홀스트, 행성 Op.32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2020 신년음악회> 중



<행성>은 일곱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곡 당시 명왕성은 발견되기 전이었다. 게다가 천문학이 아닌 점성술의 관점에서 곡을 썼기 때문에 지구는 빠져있다. 천문학에서는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고 행성들은 그 주위를 돌지만, 점성학에서는 지구가 중심이고 모든 별이 지구 위를 돈다. 즉 점성학에서 지구는 행성일 수 없다. 홀스트에게 행성은 십이궁도, 별점, 고대 유사과학과 관련된 상징이었고, 그는 각 행성의 특징을 하나씩 정해 음악으로 표현했다. 행성의 영향이나 힘의 의미는 오랜 기간 점성가들의 논쟁거리였지만, 홀스트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에 임했다.


화성, 전쟁을 부르는 자

1곡은 "화성, 전쟁을 부르는 자"다. 집요하고 반복적인 리듬이 대군의 행진을 묘사한다. 전쟁의 신 마르스에 걸맞게 긴박한 속도감과 압도하는 분위기로 곡의 서막을 연다. 탱크들의 질주, 끔찍한 살상 무기, 끝없는 폭격, 행진, 절규가 그려지는 이 구간은 대단한 웅장함을 가졌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전쟁은 추할 뿐이다. 


금성, 평화를 부르는 자

2곡은 "금성, 평화를 부르는 자"다. 놀랍다.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성술에서는 “사랑은 조화요, 조화는 평화다. 따라서 사랑은 평화다.“라는 논리로 비너스에게 평화의 상징을 부여했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화성, 부드러운 움직임이 돋보이는 'Love & Peace' 테마를 가진 음악이다.


수성, 날개 달린 전령

3곡은 “수성, 날개 달린 전령”이다. 머큐리는 작고 재빠른 신이다. 마찬가지로 수성은 작은 행성이면서 태양에 가장 가까워서 궤도도 가장 짧다. 하지만 홀스트의 관심은 점성술에서 “이랬다저랬다하며 빠르고 장난스럽다”라고 묘사하는 수성의 성질에 있었다. 이 점에 착안하여 두 개의 조가 동시에 연주되는 이중적인 음악으로 만들었다. 하프 두 대가 각각 B플랫장조와 E장조로 연주하기도 하고, 다른 리듬을 동시에 사용하기도 한다. 머큐리는 전령이므로 홀스트는 모스 부호를 상기시키는 리듬이 바이올린에 이어 글로켄슈필 연주로 반복되고 나중에 팀파니로 묘사되는 장난도 친다. 


목성, 쾌락의 신

4곡은 “목성, 쾌락의 신”이다. 올림포스 최고신 주피터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용솟음치는 향락의 기쁨을 나타내지만, 신의 제왕다운 위엄도 느껴진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주신을 ‘조브(Jove)’라고도 불렀고, 여기서 유래한 단어가 ‘Jovial'(쾌활한)이다. 홀스트에게는 이 점이 중요했다. 미국의 최초 우주 비행 프로젝트인 '머큐리 프로젝트' 실화를 그린 영화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1983)을 비롯해 영화, 광고에도 자주 인용될 만큼 가장 유명한 곡이다. 


토성, 노년의 신

5곡은 “토성, 노년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는 아들(유피테르)로부터 권좌에서 밀려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다. 1세대 신이므로 늙음을 상징한다. 이 구간은 마치 나이 든 노인이 젊은 날의 무용담을 늘어놓듯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피치카토로 연주를 쌓아가고, 음의 상승과 확대가 이어지다 이내 소리가 잦아든다. 인생의 고독함과 쓸쓸함에 달관한 노인은 초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천왕성, 마법사

6곡은 “천왕성, 마법사”다. 우라노스는 태초에 하늘의 신이었다. 마법사란 태초의 신비를 가리키는 것이며, 여기서는 가벼운 마술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큰 스케일의 마법을 말한다. 홀스트의 음악은 즐거운 마법사를 묘사한다. 시작은 뒤카스의 <마법사의 제자>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천왕성은 점점 거창하게 거들먹거린다. 끝부분에서는 갑자기 음악이 약해지더니 결국 사라지고, 느닷없이 외계에 있는 기분이 된다. 


해왕성, 신비의 신

7곡은 “해왕성, 신비의 신”이다. 넵투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이며 바다의 신이다. 행성으로는 태양계 가장 바깥쪽에 있는 신비의 별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는 바다의 세이렌을 연상시키듯 가사 없는 여성 합창이 보태지며 신비로움을 부풀린다. 악보는 곡의 끝을 문이 서서히 닫히듯이 연주하라고 지시한다. 그렇게 잠시 열렸던 우주의 문이 닫힌다.


명왕성의 위성사진


이 곡에는 흥미로운 비화가 숨겨져 있다. 1930년 명왕성이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으로 편입되는데, 홀스트는 새 행성까지 추가해 곡을 마무리하라는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새로 발견된 명왕성은 점성술에서 다루지 않았던 별이기 때문이다. 홀스트의 친구이자 극작가였던 클리포드 백스(Clifford Bax)는 자신의 회고록에 "그가 점성술로부터 끌어낸 영감을 모두 소진한 후에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라고 적었다. 홀스트가 지구를 떠난 지 66년 후, 영국의 작곡가 콜린 매튜스(Colin Matthews)가 <행성>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명왕성’을 작곡했다. 그런데 명왕성은 태양계 왜소 행성의 하나로 격하되어 2006년에 독립된 행성의 지위를 상실하고 만다. 홀스트는 가끔 점성술로 지인들의 점괘를 봐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는 명왕성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글쓴이 유형종 (무지크바움 대표,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방앗간,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이다.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클래식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곳엔 장르 불문 항상 그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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