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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Oct 06. 2021

헨델이 그려 넣은
현실적 욕망과 초현실적 판타지

인간계와 천상계, 그 사랑과 비극의 굴레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의 유럽 음악계는 온통 오페라 열풍이었다. 그중 독자적인 '궁정 오페라'를 개발해 자존심을 지킨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을 휩쓴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도 그 시대를 살았다. 독일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기를 이탈리아에서 보내면서 본고장의 오페라를 충분히 습득했고 현지의 음악인들로부터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하노버 선제후의 궁정악장이 됐다. 1710년 영국 런던으로 휴가를 떠난 그는 뜨거운 오페라 열기를 실감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독일로 돌아가지 않은 그는 궁정악장에서 해임됐고, 1726년에는 아예 귀화했다. 그는 독일 태생이지만 음악적 뿌리는 이탈리아에 두었고, 돈은 영국에서 벌었으니 헨델은 명실상부한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이었다. 그의 주 수입원은 이탈리아 오페라였고, 제작자로도 관여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다. 런던의 지식인과 재력가들이 아무리 오페라 극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들 그중 이탈리아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지금처럼 자막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극을 이해하고 음악을 즐겼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당시 유럽을 휩쓴 이탈리아 오페라를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고 부른다. 비극적이고 진지한 오페라라는 뜻이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구성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두 쌍의 남녀 주인공이 엇갈린 사랑으로 복잡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절대 권력자나 신이 개입해 질서를 복원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극에서 중요한 남성 역은 대개 여성의 음역을 내는 카스트라토(Castrato)가, 여성 역은 소프라노가 맡아 노래를 불렀고, 악역은 베이스 한 명이 맡았다. 오페라 세리아의 소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역사나 문학 작품 또는 신화에서 가져와야 했다. 그래야 관객이 가사를 몰라도 극의 전개를 이해하고, 심지어 등장인물을 식별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가사는 아주 단순했고, 가수들은 A-B-A의 '다 카포(da capo) 아리아' 형식을 사용해 가사를 길게 늘여 불렀다. 덕분에 관객은 선율의 유형, 빠르기와 느리기, 반주 패턴 등 음악적 요소를 통해 무대 위 인물이 어떤 감정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헨델은 42편의 오페라와 27편의 '오라토리오(oratorio)'를 남겼다. 오라토리오는 17~18세기에 성행한 종교적 극음악인데, 헨델의 경우 종교적 내용이 아니더라도 영어를 사용한 극음악이라면 오라토리오라 부른다. 이중 상당수는 사실상 영어 오페라다. 오늘은 그가 신화를 소재로 작곡한 10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가운데 주요 작품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한다.





헨델의 유일한 5막 오페라, 테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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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오(Teseo>(1713)는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 신화를 다룬다.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필리프 키노(Philippe Quinault)의 연극이 원작인데, 신화 내용과는 제법 다르다. 아이게우스가 아버지인 걸 모르는 테세우스는 메데아, 아길레아 공주와 사각 관계를 이루다가 아길레아와 맺어지고 아버지와 재회한다. 오페라 세리아는 3막 구성이 원칙인데, 프랑스 고전 연극을 모델로 한 바람에 프랑스 궁정 오페라처럼 5막 구성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헨델의 작품 중 5막 오페라는 이것이 유일하다.


Statue of Theseus, Syntagma Square, Athens. © Mstyslav Chernov






멜로드라마의 진수, 아키스와 갈라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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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스와 갈라테이아(Acis and Galatea)>(1718)는 영어로 된 목가극이다. 원작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쓰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바다의 요정 갈라테이아는 목동 아키스를 사랑했다. 문제는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도 갈라테이아를 연모해 옷차림에도 신경 썼고 심지어 미소도 지었다는 것. 어느 날 연인과 함께 시칠리아 바다에 누워 있던 갈라테이아는 멀리서 들리는 폴리페모스의 갈대피리 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을 듣고 분노한 폴리페모스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산허리를 잘라 던지고 아키스는 목숨을 잃고 만다. 갈라테이아는 자신이 신의 혈통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아키스의 피를 물로 바꿔 그를 강의 신으로 되살려낸다. 헨델의 영어 음악극은 오페라 작곡을 포기한 경력 후반기의 산물이 대부분이지만,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왕성하게 오페라를 쓰던 시기에 창작됐다.


<아키스와 갈라테이아>, 프랑수아 페리에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엇갈린 사랑의 아리아, 아드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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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추가 모험담을 소재로 한 <아드메토(Admeto)>(1727)는 엇갈린 사각 관계를 선호하는 오페라 세리아의 전형적 인물 구도를 보여준다.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는 병든 자신을 구하려 왕비 알체스테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헤라클레스에게 그녀를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드메토를 짝사랑하던 이웃 나라 트로이의 공주 안티고나는 왕의 사랑을 구하고, 그런 안티고나에게 왕의 동생 트라시미데가 반해버리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아드메토는 안티고나와 재혼하기로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트라시미데가 형을 죽이려 한다. 마침 사후 세계에서 돌아온 알체스테가 암살을 방해하면서 남편을 다시 한번 구하게 된다. 마지막에 아드메토는 관용을 베풀어 트라시미데를 처벌하지 않는데, 이것은 오페라 세리아의 전통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즉 극의 절정에서 초월적인 힘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연출기법에 따른 결말이다.






질투심에 불탄 여인들, 세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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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피터아 세멜레>,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디오니소스의 탄생 신화는 오라토리오 <세멜레(Semele)>(1744)에서 만날 수 있다. 세멜레를 납치한 주피터(제우스)는 그녀를 비밀 궁전에 숨기는데, 쓸쓸해 보이는 세멜레를 위해 언니 이노의 방문을 허락한다. 이 틈을 이용해 이노로 변신한 주노(헤라)는 세멜레에게 신의 반열에 오르고 싶다면 주피터가 진짜 신의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그를 침대에 오게 하면 안 된다고 꼬드긴다. 


이때부터 세멜레가 주피터를 닦달하는 모습은 극에서 아주 강력하게 묘사되는 반면 세멜레의 죽음은 덜 자극적으로 그려진다. 지나친 야망을 후회하기엔 너무 늦은 걸까. 주피터는 가장 약한 빛으로 본모습을 드러내지만, 세멜레는 그 열기에 서서히 산화하며 죽어 간다. 비밀 궁전이나 언니의 방문 대목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오라토리오에는 유명한 영어 아리아 '당신이 걷는 곳마다'와 '나 자신을 숭배하게 되네'가 포함돼있다.









신화적인 합창, 허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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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두 번째 결혼과 죽음을 다룬 <허큘리스(Hercules)>(1745)도 영어식 표기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라토리오다. 잘 알려진 신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짜임새도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허큘리스, 데자니라, 연인 이올레, 아들 힐루스, 전령 정도로 압축했다. 오페라가 아닌 만큼 허큘리스 역은 카스트라토가 아닌 베이스가 맡았다. 합창의 역할은 그리스 비극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중개하는 '코러스(chorus)'를 연상시킨다. 분노의 아리아 '나는 어디로 날아가야 하나'가 유명하다. 


(좌)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우) Hercules and Deianira,1470, Antonio del Pollaiolo





신화적 판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페라뿐 아니라 뮤지컬, 영화, 만화와 웹툰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헤라클레스나 삼손 같은 초월적인 힘을 지닌 인물과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 어쩌면 오페라는 우리가 그 욕망을 마주하도록 신화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글쓴이 유형종 (무지크바움 대표,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방앗간,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이다.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클래식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곳엔 장르 불문 항상 그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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