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위해 반드시 준비할 것

by 강상록

뭐든 준비를 미리미리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글을 쓰기 전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일단 어떤 글을 쓸지 정해야 한다. 소설, 시, 에세이 등 장르를 결정하고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도 정한다. 나 같은 초보 작가는 아직 감조차 오지 않는 '문체' 같은 문제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떤 동기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어떤 목표를 가지고 쓰는지, 깊게 생각할 부분은 얼마든지 많다.


그런데 정작 처음 글을 쓸 때 준비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글을 쓰는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준비가 필요했다.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물건'을 먼저 가지고 싶었다. 누가 묻지 않아도 "이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이에요. 작가라고요."라고 나 대신 말해줄 물건.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물건이 무엇일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노트? 연필? 요즘 세상에 누가 노트에 연필로 글을 쓰려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도 때로 노트에 연필로 글을 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탈락. 최신형 노트북? 프로그래밍을 할 거라면 모를까, 새로 산지 1년 정도밖에 안 된 노트북이 이미 있는데 글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또 사는 건 과했다. 탈락. 그러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누군가 아주 화려한 키보드를 쓰고 있었고 그 키보드에서는 '도각도각', '사각사각'하는 듣기 좋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사람이 키보드로 사각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찾았다. 글을 쓰기 전에 준비할 것. 내 취향에 꼭 맞는 멋진 키보드를 하나 마련하기로 했다. 그날부터 키보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세상이 있는지 몰랐다. '기계식 키보드'라고 부르는 키보드의 세상. 나는 지금 이 문단을 쓰면서 가장 신이 난다. 키보드의 세상을 소개하는 지금. 정신을 부여잡고 최대한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키보드에서 도각거리고 사각거리는 예쁜 소리가 나려면(그리고 소리만큼 실제로 타이핑할 때 느낌이 좋으려면) 많은 부품들이 필요하다. 키보드의 전체적인 틀을 이루는 뼈대인 '베어본'부터 '보강판', '흡음재', '기판' 등 내부에 들어가는 겹겹의 판, 키를 누를 때 어떤 느낌이 나는지를 결정하는 '스위치'라고 부르는 버튼, 가장 위에 씌우는 글자와 숫자가 쓰여있는 껍데기인 '키캡'까지. 다 만들어져 있는 기계식 키보드도 있고 지금 소개한 여러 부품들을 하나씩 모아서 취향에 맞게 만들기도 한다. 몇 문장 안에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들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나의 키보드를 준비하는데 꽤나 많은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였다(물론 어느 정도의 돈도).


'글쓰기 준비'가 '키보드 수집'이라는 전혀 관계없는 활동으로 변질된 후, 키보드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일만 하기에는 더 이상 양심이 버틸 수 없던 어느 날부터 나는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위한 신청서, 자기소개서, 글 몇 편을 오랫동안 어렵게 써서 제출했고 결국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하마터면 키보드 전문 유튜버라도 될 뻔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노선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키보드는 글을 쓰기 위한 준비였다기보다는 글쓰기를 미루고자 했던 핑곗거리였다. 키보드가 따로 없어도 글을 쓸 수 있었다. 노트북에 이미 키보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글을 정말 쓰고 싶었으나 또 정말 쓰기 싫었다. 쓰기 싫은 마음은 정상이라고 유명 작가들의 책과 인터뷰에서 수도 없이 읽고 들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꾸역꾸역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그 시간이 아주 행복하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결과물을 읽는 일도 즐겁다.


어느 정도 글쓰기가 습관처럼 자리 잡아가는 요즘, 키보드를 '도각'거리다가 문득 과거를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한 준비는 사실 특별하달 것이 없다. 그냥 펜을 들고(연필도 좋다) 혹은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그것이 새로 산 '기계식 키보드'가 아닐지라도) 써 내려가면 된다. 쓰다 보면 글이 길을 찾아간다. 이 글을 어디에 올릴지,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지도 점차 눈에 들어온다. 무슨 주제로 글을 쓸지도 자연히 보이고 떠오르는데, 쓰지 않아서 문제지 평범한 일상에도 글 한 편 쓸거리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키보드 수집 따위를 글로 쓰는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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