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자마자 엉엉 울고 말다.
2박 3일간 오빠와 재희와, 글램핑에서 보낸 시간은 의외로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 글램핑 퇴실시간에 맞춰 나와서 우리는 함께 내 대학원의 기숙사 앞까지 왔다.
여름학기 마지막 수업이 오늘 하나 남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나를 내려다줬고
재희에게는 "이모랑 다음에 또 놀러가자~ 방학도 재밌게 잘 보내!" 라며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캐리어를 끌고 내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자마자 울음이 쏟아져나와 엉엉 울어버렸다.
사실 어제부터 삼킨 울음이었다.
어제 낮, 오빠가 재희를 씻기는동안 흐르던 눈물이 제대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젯 밤엔 오빠와 불멍을 하는 중에 "눈이 따가와서 눈물이 자꾸 나네" 라며 소리없이 울었는데, 오빠는 알았을까?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은 덥기만 했지 눈은 전혀 따갑지 않았다는걸.
그랬다.
내가 걱정해야 했던 건 '이틀간 재희와 어떻게 잘 지낼지'가 아니었다.
'오빠와 재희, 그 둘과 함께 있을 모든 순간순간의 상처들을 어떻게 버텨낼지' 였어야 했다.
월요일 아침, 오빠가 재희와 함께 우리집 앞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라고는 만나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는 나여서
재희를 처음 보는 순간의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며칠간 고민하고 걱정했는데
오빠 차가 오길 기다리는 20 분간 나는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초조함에 손끝이 얼음장같이 식어갔다.
재희와 어색한 첫인사.
의외로 재희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다.
누가봐도 감탄할만한 예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앉아 낯을 가렸다.
"아빠 친구가 같이 간다고 해서 삼촌일까봐 싫었는데 이모라서 다행이래"
재희에게 대충 이모를 소개하고 2시간여 차를 같이 달려가며
끝말잇기, 초성퀴즈를 하며 조금씩 어색함도 줄었다.
같이 유튜브를 보며 "재희는 뭐가 되고 싶어? 아이돌은 누굴 좋아해? "
그 나이의 아이에게 할법한 모든 질문을 했고, 재희는 귀찮아하지 않고 모든 대답을 친절히 해주었다.
"이모, 아빠 전화번호 외우고 있어요?"
"아냐, 못외웠어"라고 대답하자 "우리 아빠 번호는요, ------- 에요. 이모 외워봐요"
이처럼 중간중간 당혹스러운 모먼트도 있었긴 하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희의 손을 잡는건 너무 멋쩍은 일이라고 생각됐다.
그냥 손을 마주잡은 아빠와 아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닐수 밖에 없었다.
애써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어색하게 주춤주춤 걷는 내가 너무 거북스러웠고 자괴감이 들었다.
도착한 글램핑장은 수영장이 딸려있는 곳이었다.
재희는 내 방은 별도로 있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이모 방도 구경하러 가요~"라고 소리치며 방을 나가려 했다.
나와 오빠는 순식간에 굳었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가 "이모도 여기서 자는거야. 이모는 바닥에서 잘거구 우린 침대에서 자면 되잖아"
재희가 "왜?? 왜 이모랑 같이 자? 우리끼리만 자는거 아니야?"
식은땀 모먼트, 머리가 댕, 하고 울렸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그게 나였다.
관계를 정확히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이모.
짐을 풀자마자 수영복을 갈아입고 나와 2시간 반동안 물놀이를 했다.
재희는 지치지도 않았고, 잠시 나가서 쉬자고 하면 떼를 쓰며 안된다고 소리쳤다.
오빠와 나는 재희를 튜브에 태워 온갖 장난을 다 쳐주었다.
거의 신들린것처럼 물속에서 방방 뛰며 재희를 웃겨주었고, 나는 모처럼 진심으로 물놀이가 이렇게 재밌구나,
너무 신나게 진심을 다해 놀았다. 조그마한 아이를 들어업기도 하고 조막만한 손을 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내 자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신기했다.
"아까는 이모 어색했는데 지금은 안그래요"하는 재희 말을 듣고나서는 기분도 좋았다.
물놀이를 하는 내내 오빠의 눈은 재희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나와는 눈이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재희를 더 많이, 오래 보았지만 말이다.
소리를 지르며 무당처럼 뛰어노는 내 자신을 자각한 순간,
이모습을 우리 엄마가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이 엄습했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숙소로 돌아와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셋이서 무서운 영화에 만화영화까지 줄기차게 같이 보며 얘기도 많이 했다.
재희가 친구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동안
오빠에게 "재희가 똑똑하고 눈치도 엄청 빠른 것 같아. 나 오늘 물놀이 너무 재밌었는데 다음에 또 워터파크 같이가자"라고 까지 얘기했었다. (내가 왜 그랬지?)
오빠도 중간중간 "고생했어. 고마워" 얘기해주었고
첫날의 밤은 분명히 너무 기분좋고 뭔가 다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오빠와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내가 먼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보니, 나는 바닥에 혼자 누웠고
재희와 오빠는 침대에서 얼싸안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이때부터였던것 같다. 첫날 느꼈던 벅찼던 감정이 파사삭 식어버렸던건.
당연히 오빠와 재희가 침대위에서 자야겠지. 내가 재희를 데리고 잘수는 없으니.
그치만, 이 곳에 있는 나는, 다정한 부녀사이에 꿔다놓은 보리 한자루에 불과해 보였다.
새벽 3시부터 5시반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여기 지금 내가 있는게 맞는건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앞으로. 끝까지는 못가겠구나.
재희도 내가 다 끌어안을 수 있을거라 호언장담했는데, 안되겠구나. 나는 못하겠다.
죽고 못사는 부녀 사이에서 무수히 상처를 입어가며 버틸 자신이,
내가 그만큼이나 무던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두번째날의 물놀이가 시작됐다. 이번은 3시간이었다.
술래잡기, 폭포타기 놀이, 달리기 경주, 튜브에서 떨어지지 않기 놀이..
놀이의 종류는 끊임없이 재희 머릿속에서 샘솟는것 같았다.
역시 신명난 무당처럼 놀았다. 살이 2킬로는 너끈히 빠진 기분이었다.
팔에는 근육이, 다리에는 무감각이 찾아왔다.
재희는 아빠를 어찌나 끔찍이 여기는지 연신 "아빠 괜찮아? 아빠 다친거 아냐?"
재희와 아빠, 둘만의 세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재미나게 놀긴 했지만,
그저 그냥 애초부터, 누군가 들어갈 작은 틈조차도 없는 저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저 남자가 영원히 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걸 명백히 깨달은 데서 오는 정신의 맑아짐.
저 남자의 세상은 저 아이뿐이라는걸, 나는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도 없는 한낱 지나가는 여자에 불과하다는것을 눈앞에서 켜켜이 보고 말았다.
그러자 화가 치솟았다. 이혼한적 없는 남자와 하는 연애가 지금 당장 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나에게 잘해줘도, 누구보다 나와 잘 맞고 재밌다고 해도 다 필요없어.
나는 애도 없고 이혼한적도 없는,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남자랑 결혼해서 애기 낳고 잘살거야.
그 말을 악다구니 쓰며 뱉어버리고 싶었다.
재희가 먼저 씻고 내가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재희가 입모양으로 "쉿! 엄마에요"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엄마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던 중이었던 거다.
나는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화장품만 냅다 집어들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텐트 밖으로 나와 그 무더위에서 크림을 발랐다.
통화는 계속 이어졌고,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여자처럼 오도가도 못하고 그러고 앉아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만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방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나,
저 여자에게 상처가 될까봐 숨어 있는 내모습,
이런 내가 느끼는 상처는 누가 알아주는 걸까.
또한번의 커다란 자괴감...
통화가 끝난 재희는 나에게 "우리 엄마는 카리나 닮았어요"라고 말한다.
알고싶지 않은 얘기,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마당에 또한번의 충격...
저녁은 또 바베큐를 해 먹었다.
재희는 요즘 아이답지 않게 너무 착하고 순했다.
아빠가 더운데 밖에서 혼자 고기굽느라 힘들다고
그릇에다가 깻잎에 상추에 김치에 고기에 쌈장에 마늘까지 아빠꺼라고 따로 덜어서 갖다 주느라
정작 본인은 먹지도 않고 "아빠 힘들어? 얼른 먹어. 이거 먹고 해." 야단법석이다.
텐트밖에서 서로 쌈을 싸서 먹여주고 있는 아빠와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텐트 안에서 혼자 고기를 입속에 우겨넣으며 와인을 따라 마시는 내마음은
솔직한 심정으로, 비참하다?? 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들은 가족이고, 나는 타인이고 불청객이고 이방인이었다.
순간순간이 비수같았다.
애써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아, 더는 갈 수 없는게 맞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오빠는 이런 상황들이 내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거, 생각지 못한걸까.
오빠의 눈을 도저히 마주 쳐다볼수가 없었다.
나와 있을때와는 다른 색깔의 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딸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을.
나는 자꾸만 피할수 밖에 없었다.
항상 내손을 잡고 있던 오빠의 손은 이틀동안 재희에게 오롯이 붙들려 있었고
재희가 잠들었을 때만 잡아보는 오빠의 손은 갑자기 낯설었고 설레지 않았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오빠에게 소리쳤다.
"나랑 헤어지고 싶어서 이런거지? 나 떼어내고 싶어서 여기 나 데리고 온거 아니냐구.
이 꼴 다 보면 내가 떨어져나갈까봐 이런거잖아. 나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오빨 계속 만나. 못해"
펑펑 울고 있었다.
또 다른 꿈이 이어졌다.
"오빠, 헤어지자." 내가 말했고 오빠가 울었다.
새벽 3시에 깨어나니, 오늘도 역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부녀의 등을 바라보며
바닥에 누워 눈물을 훔쳐냈다.
왜 이런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했을까. 왜.
내가 걱정했어야 할 건 "모든 순간이 상처가 될 이틀"이었다.
재희의 존재, 재희와 나의 관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빠와 딸,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실로 아직 엮여져 있는 전처.
이 셋이 똘똘 뭉쳐 나를 반대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불분명한 태도로 서있는 내가
부녀간의 대화와 행동 속에서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소위 말하는 "짜친다"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어디에 표현도 못하고 몸서리치게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는 데 있었던 거다.
절대 나와 오빠가 하나가 될수는 없을 거라는걸 직접 보고 겪고 느꼈다.
이미 하나인 두 사람을 시샘하고 질투하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이 나였다.
괴물같은 내 마음속이, 뒤죽박죽인 마음속이 너무 고단했다.
지금 여기에 표현하지 못한 수 많은 감정을 순간순간 느꼈는데,
여기에 꼭 적어야지 다짐했었는데 어느샌가 희미해졌다.
그 감정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읊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생각해서 잊어버렸다.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며 울다가 지금은 기운이 빠져서 잊고 말았다.
지쳤다. 지친다. 정말.
몇년전, 오빠는 재희와 여사친과 함께 수영장을 간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건 여사친이 먼저 제안한 여행이었다고 했고,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아 그 여자는 오빠를 정말 남사친으로만 생각했나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내가 사귀고 있는 남자의 아이라면 애써서 자발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을테니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치만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절대, 자발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을거라는 이유는 잘 떠올릴 수 없었다.
단지 어색해서? 나의 존재가 애매하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것 같다.
무의식은 이미 알아차렸던거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와의 만남은 어차피 나에게는 상처만 남길거라는 것을..
금요일부터 3일간 오빠와의 여행이 계획되어 있는데,
여기에 써넣은 글들 중에 손톱만큼이라도 오빠에게 털어놓고 싶다.
그 이틀이 나에게는 얼마나 상처가 됐는줄 아냐고.
오빠와 재희의 끈끈한 세계 안에, 나도 속할 수 있을거라고 그동안 해온 상상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게됐다고.
항상 걱정했던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걸 알게돼서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느냐고.
오빠는 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
오빠의 가장 큰 행복과 사랑이 뭔지 너무 잘 봤다고.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알려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