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들어가 본 바다는 차가웠다. 피서를 하겠다고 서울에서 그 먼 거리를 달려온 목적은 달성할 듯했다. 지정된 숙소는 바다 쪽 3층이어서 전망도 좋았다. 그런데 짐을 풀면서 내려다본 바다에는 사람이 없었다. 팔월 중순 이 더운 날씨에 바다에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에, "해파리가 출몰하고 있으니 바다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지난해 강릉 송정에서 즐겁게 해수욕했던 기억에 한껏 들떠 있었는데...
저녁시간 대에 바비큐장을 예약해 놓고 나니 남는 시간이 애매했다. 숙소로 들어올 때, 바로 옆에 김일성 별장이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에어컨 바람에 눌러앉아 있기보다 김일성 별장으로 산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내와 아들들을 채근해서 밖으로 나왔다. 아들들은 썩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따라나섰고, 김일성 별장을 거쳐 산책로 정상으로 가는 것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는 땀이 좀 나더라도 산책로를 따라 더 가봤으면 했는데,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를 보니 더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내려와 바닷가를 좀 더 거닐다 숙소로 들어와 바비큐 음식 준비를 했다.
아내는 아들들이 직장을 잡고 독립해 나간 이후 삼 년째 매년 여름 나에게 가족여행 가기를 재촉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와 아들들 간 정서적 공감대를 넓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아들들 누구라도 결혼하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다녀와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 아내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체감되는 성과는 미미했다. 지난해는 큰 아들의 안 좋은 운전 습관을 보고 내가 화를 참지 못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썰렁한 분위기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이번 여행에는 아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대한 입은 닫고 귀만 열기로 작정하고 따라나섰다.
지난해 송정 여행 때 씁쓸한 마무리의 감정이 남아있어서인지, 아들들의 초반 분위기는 경직된 듯 보였다. 아내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온 것처럼 약간은 수동적으로 행동했다. 하여튼 바비큐장에서 고기를 굽기 전까지는, 아내의 여행 목적을 달성하기가 요원해 보였다. 고기가 구워지고 술이 들어가면서 분위기 반전을 위한 아내의 눈물겨운 고투가 시작되었다. 고진감래라더니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서 속 깊은 이야기도 오가기 시작했다. 아들들 모두 직장생활 만족도와 열의는 문제없어 보였는데, 여자친구들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큰아들은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를 지금 만나지 않고 있다 했다. 그렇다고 헤어진 것은 아니란다. 심지어 아직까지 서로 좋아한단다. 얼마 전에 여행을 같이 갔다 오고 해서 잘 사귀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결혼해서 사는 부부에게만 권태기가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 말을 하는 큰아들의 한숨과 짜증스러운 표정에서 많은 고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아들은 여자친구와 직장이 떨어져 있어 자주는 못 보지만 계속 만나고 있다 했다. 어디까지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냐는 질문에, 단호히 결혼은 아니라고 한다. 그냥 편하고 말이 통해서 만나지만, 미래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들의 자녀 결혼식에 자주 참석하면서, 우리는 언제쯤일까 상상해 온 터여서 아쉽기는 했다. 조심스럽게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막상 결혼까지 가기는 머나먼 길일 것 같은 말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하지만 결혼은 아들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나 전환점이 될 수 있기에 닦달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여자친구와의 사귀는 분위기라도 솔직하게 털어놔준 아들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같이 미래를 그려가면서 사귈 수 없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들들이 여자친구 관계의 일단을 털어놨지만, 막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너무도 궁색했다. 물론 내가 결혼할 때와 너무 다른 환경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젊은이들이 결혼까지 이르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한 실상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공감해 줄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냥 내가 결혼했던 시기의 사고에 머물러 있었고,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어쩌면 '하나마나 한 이야기' 수준이 전부였다. 한편으로 이제까지 아들들 앞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아내와 다투던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 그들의 결혼관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되었다. 그냥, 결혼이라는 골인 지점 설정 없이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면서 관계 진전을 가져오기 어렵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최근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남성은 79%, 여성은 63%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결혼 건수만 보면 40년 만에 반토막이 날 정도로 줄어들고 있다. 결혼을 망설이는 이유를 보면, 경제적 여유 부족, 출산과 양육 부담, 결혼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당장 신혼집 마련과 결혼식 비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본인의 고용 불안정,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고행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보다는 연애를 선호하는 분위기, 연애도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연애에 국한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판단력 부족, 이혼은 인내력 부족, 재혼은 기억력 부족', '이혼의 원인은 결혼',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젊은이들의 결혼이라는 검색어를 치니, 결혼을 냉소적이나 부정적으로 묘사한 말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결혼을 원하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당장 하고 싶지는 않고, 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준비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여기는 문제들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젠 아들들이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선뜻 고민을 해소할 수 있는 언질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큰 아들 어렵게 털어놓을 때의 한숨 소리와 짜증스러운 표정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 자리에서 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해주고 싶었다. "결혼 생활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고난을 같이 이겨내면서 느끼는 희열도 못지않게 크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외롭고 고단한 노후를 상상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