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걸어서 다니는 김 과장

by 버티기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영화는 가끔 한 편씩 본 적은 있어도 드라마는 평생 처음이다. 드라마 보기를 썩 내켜하지도 않거니와, 장시간 정성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 고행길로 인도한 드라마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다. 서술형 제목인 것도 흥미로웠고 살아가는 이야기일 것 같은 이미지였다. 무엇보다도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면서 관심이 생겼다.


아무 계획을 잡지 않았던 토요일, 아내와 난 TV앞에 앉았다. 그냥 집에서 쉬면서 이 드라마를 보자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작은 아들이 넷플릭스 볼 수 있도록 해줬는데, 보지 않는다고 성화한 것도 한몫했다. 드라마를 보기 전, 스토리 전개는 전혀 모른 상태였다. 혹시 스포일러가 될까 봐 내용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상 1화가 시작되자, 아내와 난 자연스레 정주행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드라마는 총 12회였고 평균 러닝타임은 60분 정도였다. 두 차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귀하디 귀한 토요일 하루가 꼬박 소모된 것이다. 최종회가 끝나니 밤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명화를 보고 난 후의 감동과는 여운의 성격이 달랐다. 마치 조금 전까지 드라마 속에 있다가 빠져나온 듯했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간 소모의 가치는 충분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송희구 작가의 웹 소설 연재로 시작되어 웹툰, 드라마까지 진화해 온 스토리가 있었다. 원작은 작가가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지하철 조조할인 출근하고 바나나로 끼니를 해결해 가며, 200억대 자산가로 성장한 자전적 소설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드라마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차이가 있는 듯했다. 원작이 부동산 자기 계발서와 같은 성격이라면, 드라마는 감성적인 요소와 가족의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페르소나는 부동산 전문가 송 과장이었지만, 주인공은 김낙수 부장이었다. 그는 25년 간 회사가 모든 것인 양 살아오며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명문대 아들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임원 승진 탈락은 물론, 그동안 쟁취했던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드라마 내내 김 부장은 나의 페르소나였다. 뭐가 중요한 건지를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삼십 년 넘게 군(軍) 생활을 하면서 삶의 중심을 부대에 두고 살았다. 진급을 위해서 가족들의 희생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아내의 고충을 돌보는 것,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보다, 상급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함정 근무 때의 수많은 전방해역 경비로 인한 부재, 거의 일 년 단위로 전학을 해야 할 만큼 잦은 근무지 이동은 가족들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김 부장이 퇴직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가 안아주며 "고생했다. 김 부장"하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진급 누락되고 훌쩍거리며 미안해하는 나를 안아주며 "그동안 수고 많았어." 했던 데자뷔였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항상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주었다. 듣기보다는 말을 많이 했었어도 아들들이 자신의 위치를 잘 찾아갔다. '그게 인생이야' 하며 퉁치고 지나고 싶어도 가족들의 가슴에는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 느껴진다.


김 부장처럼 재직 중 서울 자가는 불가능했고, 전역 후에 끌어모아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아내 몰래 퇴직금에 손대고 대출까지 감행하진 않았다. 이 드라마의 백미는 김 부장이 백 상무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세차업 시작을 결심하는 장면이라고 본다. 다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꼭 전역 후 나의 모습과 닮았다. 이미 이십 년 전 거쳐온 과장이라는 직책을 다시 하면서, 보라매 공원을 지나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다. 그동안 제자리에서 나를 지켜준 가족들에게 감사함을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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